호질: 한반도 땅을 빗대어 전쟁의 상흔을 말한다. "이제 가장 토박이 모습을 빌려,/우리 땅 한복판에/도사리고 누워서,/피의 수수께끼를 던진다"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우리는 피의 공양을 전쟁이나 부패, 공해의 형태로 바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배고파 우는 아이, 뿔 잘려 죽은 동물원의 사슴, 달아나는 유엔 군용 열차, 날아가는 제트기.... 우리 시대를 읽게 하는 것들. "어쩌다 기차 여행을 하게 되어 대합실에 들러서 항상 닫혀 있는 경원선 매찰구를 보게 될 때. 그리하여 꿈의 열차에 실려 우리들의 고향에 도착하였을 때. 아무도 이제는 벌써 당신을 아는 이 없고, 일찍이 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옥사들이 늘어서 있으며 당신의 본가이던 집 속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당신을 손가락질하며, 

"야 이놈은 이 집에 살다가 월남한 반동분자 아무개의 몇째 아들이다."

하면서 달려들 때, 그때 당신은 난데없는 애수를 느낄 것이다." 16

  크리스마스 유감: "우리 사회는 사회가 아니라 피난민 수용소" 26 "크리스마스에 공연히 소란을 부리는 우리 사회의 딱한 풍조로 말하면 신자들에게는 아무 죄도 없으며, 우리 사회의 딱한 여러 일들 가운데 한 가지 현상일 뿐이다. (...) 신자들이 보다 뜻있게 보내기를 원하는 날과 밤에 하필이면 소란을 피워서 마치 신앙 그것이 그런 꼴로 되기나 한 것 같은 착각을 준다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다. (...) 하루빨리 신자들의 날을 그날답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27 _크리스마스 캐럴 연작의 배경이 됨직한 단상이다.

  상아탑: "고향을 떠난 사람은 고향, 고향 하지만, 막상 가놓고 보면 어떻달 것도 없는 것이 고향이다. '고향 상실'이라는 현상은 근대사회의 형성 과정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인데 '모교'라는 것도 실은 비슷한 것이어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한 번 떠나면 다시 관계하는 일이 없는 곳이다." 28-9 환경과 환위의 구분. "환위란 주체적 환경이라고 할까, 생체와 관련된 환경의 부분을 말한다. (..) 사회인이 되고 나면 각기 나름으로 환위가 정해지는 법이다." 29-30 최인훈은 기본적으로 역사주의적 관점으로 사회의 '발전 단계'를 인식한다. "봄이 되면 꽃이 피듯이 사회의 역사에서도 단계가 오면, 올 것은 오고 만다. 오는 것을 잘 처리하는 것이 문명사회의지, 부적이나 금기의 권유로 막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 33

35-36 과거의 나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상상 속 장면, 과거의 나는 자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는다. 하나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기억이라는 감옥. 잊어서는 안 된다는 옥칙. 잊지 않았다는 다짐ㅡ그게 소설인즉 그 점은 안심하게."" 36

  정당이라는 극단: 근대화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중앙 집권에 대한 시정으로 지방 분권, 지방 자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 '우리는 모두 피난민'이라는 의식은 여기서도 잘 드러난다. "아마 이 국민 전체가 60년 이래의 피난민이 아닐까. 일청·일러전의 피난민. 왕조에서의 피난민. 그동안 바뀐 숱한 수용소 당국자들. 왕조의 깨끗한 양반 관료보다도 못한 대민 의식. 자국민이 아니니 적성 난민으로 통치하던 일제. 피난민 자치회보다 못해온 역대 정부." 82
  세계인: 우리는 우리의 바스티유 습격을 60년 4월에 이뤄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일이며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을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후려쳐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돌아간다. 회향한다. 돌아갈 고향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4월의 가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저 4월의 그날이 왔다. 그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날 한국의 자유가 탄생하였다. 그날 한국의 전통이 탄생! 하였다. 그날 모든 것이 비롯하였다." 93
"한국인 최인훈 선생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생득 관념이 아니라 학습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오히려 중대한 것은 서양 사람들의 앞에서 말한 독선보다도 열등감에 사로잡힌 동양인의 심리라 하겠다. (...)
동양이 세계사에 등장한 것은 개척민으로서가 아니라 인디언으로서였다. 다만 다른 것은 인디언은 멸종했으나(천연기념물로 잔존해 있는 것은 고려에 넣지 말기로 하자) 동양인은 살아남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문제는 다른 것이다. 아무튼 정복자로서 나타난 사람들의 가호신이 더 우수해 보인 것은 그들의 대포가 가전의 명궁보다 좋아 보였기 때문이라는 소박한 관찰을 나는 고집한다. 이런 패배 의식이 우리를 아직도 누르고 있다.
나는 확신한다. 서양 사람들이 무당 신앙으로 개종했다는 보도가 AP를 통해 들어오면 한국인이 그날로 전통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한국인(혹은 동양인)이 스스로의 정신적 주체성을 굳히는 작업에서 최대의 장애물은 기독교 그것이다." 98
"4월의 아이들은 열등감의 검은 벽을 폭파하였따. 이 구멍으로 나가라. 당신의 눈앞에 전개되는 운명의 지평에 맞서라. 그때 당신은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되기는 고달프고 벅찬 작업이다. 전통이라는 이름 밑에서 비겁한 후퇴를 말자. (..) 현재로서는 토인들의 부메랑처럼 자동적으로 돌아갈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없다, 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은 미래의 저 어둡고 그러나 화려한 지평의 저편에 있다." 104

일본인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서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본 결과 나는 매우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구란 말로 우리가 연상하는 문화적 제 가치는 결코 고정 특유하고 단일한 어떤 실체가 아니라 거의 이 지구상의 모든 제력이 특정 시기에 지표상의 서구라는 부분에서 행복하게 조합된 어떤 현상이며 그것이 지구의 여타 지역에 퍼졌을 때의 그들과 우리들의 환상까지도 곁들인 매우 애매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서구적 '기술'이라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결코 석탄의 매장 모양으로 서구라는 지역의 '토산'이 아닌 것입니다." 107


  베트남 일지: "지난 1월 9일", 시인 두 사람 작가 세 사람이 작가 초청 프로그램으로 베트남에 간다. 그리고 "오늘,"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지구 위에 베트남이라는 곳이 정말 있는 줄 알게 됐다는 것이, 가장 분명한 경험이다. 나는 이것을 작은 일이라 생각하지 못하겠다. 베트남에 대한 모든 복잡한 지식에 육체를 마련한 셈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담긴 이 먼 나라의 경험의 육체를 잘 키우고, 바르게 이용하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나의 즐거움에 속한다." 145

  로봇의 공포: "사고의 모형"으로서의 고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타자에 의해 제작된 로봇과도 같다. 어제가 없고 내일이 없고 문화적인 부자 관계가 없는, 오늘만 있는 비인非人으로서의 로봇 말이다. 

역사와 상상력: 주체와 사상은 행동 속에 결합되어 있다. 주체가 바람직한데 사상이 나쁜 경우는 없다. "이 같은 착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떤 사상, 어떤 주체에 대한 선입견을 각각 가진 다음, 이것들을 나중에 서로 결합하는 데서 생긴다."161

"역사가 복수 주체 사이의 극이며, 역사적 행동의 기폭력이 타자와의 투쟁, 경쟁에 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사람들은 흔히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 (...) 가령 다른 국민에게는 없고 그 국민에게만 있는 어떤 '국민정신'은 어떤 것일까? 그런 것은 없다. 어떤 국민이 상황의 어떤 국면에서 취하는 어떤 '태도'만이 실지로는 있는 것이다. 어떤 국민에게 '속성'이라는 의미에서 귀속되는 '국민정신'이란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이란 인식의 어떤 수준에서 성립하는 현상을 모든 수준에 적용하는 잘못이다. 뿔은 소의 '속성'이지만, '군국주의'는 어떤 '국민의 속성'이 아니라 어떤 국민의 어떤 시점에서의 태도다."163-4.

사회적 유전인자: "불란서 소설가 발자크는 사람에게는 자연적 종과 사회적 종이 있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자연계에서 사자니 코끼리니 하는 종이 있듯이 사람들에게도 사자급 사람, 코끼리형 사람…… 이런 식으로 자연계에 견줄 수 있는 종이 있다는 의견이다. 이것을 좀 넓혀서 생각한다면 '국민성'이라는 개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국민성을 구별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문화'라는 것이 될 것이다." 170-1

사람은 '자연의 얼굴'과 '사회적 얼굴'을 지니고 있는데 자연의 얼굴은 생물적으로 타고난 얼굴이며 사회적 얼굴은 문화(생활의 꾸밈새)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얼굴이다. 최인훈은 가면과 맨 얼굴을 언급하는데, 어떤 특정한 탈과 분리된 '한국 사람'은 사회적 내용 없는 말뿐인 것이라고 말한다. "동포라는 것은 같은 가면을 썼기 때문에 동포인 것이지, 우리가 정한 사회적 약속─ 우리가 쓰기로 한 탈과 다른 탈을 쓰고 있는 사람은 이미 동포가 아닌 것이다. (...) '조국' '동포' '한국인' 같은 존재는 시간마다, 날마다, 세대마다 구성하고 획득한 존재이지, 천부의 소유물이나 귀속이 아니다, 라는 것이 '사회적 종으로서의 인간'의 정상 감각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동적으로 상속시키거나 유전시킬 도리도 없는 '사회적 유전 정보' '사회적 DNA'이다. (...) 조국의 재획득─이것이 오늘 우리가 치러야 할 국민적 목표다. 조국이란 우리가 만들면 있고, 만들지 않으면 없고, 저절로는 절대로 없는 인공적 종이기 때문이다." 173-4

  예술 외교: "한민족의 이상적 모습과 희망을 담고 있는 예술을 이웃 나라들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됐다." 266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브로크포트대 연극과 공연을 보고: 1977년 여름, 원작자의 공연 참관. 

  입명의 형식─「하늘의 다리」에 대하여: "문학도 다른 전달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 문학이 그것으로 표기되고 있는 말이 쓰이는 사회에 의견의 일치가 있을 때 가장 생산적이다. 의견의 일치란 여기서는 문화적 동일성을 말한다. ㅜ일는 현재 그런 동일성이 미형성인 시기를 오래 살고 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게 어떤 안심입명을 주기를 누구보다 바라면서 어디에서도 그것이 얻어지지 않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나는 이런 무정형의 공포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408

  문명의 광장에서 다시 찾은 모국어: "전에는 무엇인가가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 자의의 밖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탐색의 순례'를 했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에 '지금' 닿는 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어요. 찾는 입장에서 만드는 입장으로." 413

  성숙과 소속: "피난민이란, 고향을 떠나 아직 현 거주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그런 삶이다. 재외 2백만의 사람들과, 지난 전쟁 때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옮긴 고향 떠난 사람들을 합치면 실질적으로 피난민이라 불릴 사람의 수는 민족 인구의 10퍼센트 가깝다. 피난민이란 표현은 문학적으로는 몰라도 좀 지나치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말 이래 우리 국토는 러시아·중국·일본의 전장이며, 1940년대에는 다시 중국·미국·소련·일본의 전장이 되고 1950년대에는 남북 전쟁의 장이 되었다. 이 모든 전쟁 떄문에 거주지를 떠난 사람들을 피난민이란 말 말고 다른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434

우리에게는 소속과 그 안의 성숙이라는 인간 생활의 기본 뼈대가 없다. 이것을 창조해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소속과 성숙이라고 하는 것이 기득권의 향유와 보존이 아니라, 국민적 규모에서의 모험과 도전을 개인의 차원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갈데없이 서사시적, 영웅적 과제에 가깝다. 이러고 보면 현대 한국인은 꼭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다." 435


작품 끝에 두 해설이 있는데, <새로운 세계 질서의 꿈>은 유익한 내용이 많다.

"정리하자. 문학의 정치성(혹은 민주주의적 특성)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4·19 정신으로 회향하여 '조국의 재획득(또는 '독자적인 국민정신의 발전')'을 이루자는 것, 이것이 최인훈 수필의 중핵이자 도달점이다."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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