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이 되기 위한 문명한 의식: "자아가 타아와 어울린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남'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이란 자기가 '먹어버리는 것'이거나 '먹혀버리는 것'이거나 하는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서유기』에서는 '자기 안에 있는 남(그러면서도 자기 안에 있고 보면 그것은 자기이기도 한),' 그러한 의식의 구조를 탐구해보았다." 24


"『광장』에서 내가 내놓지 못했던 이 지상에서의 창조적 생활의 원리가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 「태풍」에서의 '부활의 논래'이다." 29


태풍 연재가 끝날 무렵인 73년 9월 아이오와 대학 IWP 초청, 1976 5월에 귀국. 


"언어 예술은 언어 표현이라는 것의 개체발생 연습이라는 성격을 가지는 인간 행위다." 34



상황의 원점: "근대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만, 유럽의 경우에는 근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한 민족 속에 단일한 정치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민족은 유럽의 근세사의 문제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셈이지만, 이 문제는 기계적으로 그렇게만 대비할 성질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록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일망정 남북은 각각 분단의 세월을 충분히 창조적이고 명예스럽게 보낼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1-2


변동하는 시대의 예술가의 탐구:

"사실 그동안 많은 독자나 평론가들이 가령 최 아무개의 피란민 의식이라든가 하는 말을 많이 해왔는데, 그것은 조금 정신사적인 말로 옮겨본다면 일종의 문화 충격이라고 할 수 있겠고, 또 변경인이라는 사회학에서 이미 세워진 그런 카테고리에 드는 체험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봐요. 특히 내 경우에는 가령 중앙의 문화가 그리워서 변경인이 중앙으로 점점 가까이 온 경우가 아니고 정치적으로 타율에 의해서 우리 집안 자체의 필연적인 삶의 길을 찾아 이동해온 것이거든요. 그것이 한편으로는 공교롭게도 문화적으로 굉장한 갈등을 안겨주었는데, 그런 이동이 그동안에 저 자신 작가로서 가장 집착하는 문제가 되었고, 앞으로도 아마 필연적으로 정해진 저의 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58-9


광장에서 죽은 이명준을 회색인과 서유기에서 다시 살리려는 작업이었냐고 묻는 김현의 말에 그렇다고 수긍하는 최인훈. 74. 

광장은 1960년 10월에 발표되었는데, 4.19이후에 썼다고 한다. 최인훈은 이명준의 죽음은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다시 밝히고, 그의 자각된 의식의 선택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죽음'은 있지만 '주검'은 없는 그런 상태의 죽음"(79)

김현의 질문. "선생님의 소설들을 보면 가령 고대 소설의 제목을 계속해서 차용한다든지 혹은 「크리스마스 캐럴」 「총독의 소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이 연작 형태를 취함으로써 이명준식으로 얘기하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시체, 주검 자체는 남기지 않는다는 그런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해보는 형식을 보이는데, 이것이 선생님의 소설적인 방향과 어떤 대응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설 이론에서 얘기하는 어떤 여행, 그게 내적인 여행이든 외적인 여행이든 그런 여행의 한 변형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80)

최인훈은 이에 대한 답으로 우리나라 20세기의 역사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가만히 있지 않는 상태"였다. 작가들은 그것을 자신들 나름대로 이 움직임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했던 것.


김현 : "그런데 선생님의 방황이라든지 하는 것은 가령 황순원 선생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가리켜 유랑민 근성이라고 한 적이 있는 그런 측면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찾아야 되겠다는 마음자리 때문에 방황한다는, 예를 들면 그야말로 악몽 속에서 한없이 표류하는 화란인들이 아니라 돌아갈 땅이 있다는 것을 믿고 헤매는 유태인들의 방락이라고 할까,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차라리 방금 말씀하신 대로 문학사회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길이 끊어진 곳에서 여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현대인들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81)


최 : "(...) 내가 작품에서 다뤄온 우리나라 최근 백 년 동안의 역사나 나 자신의 살아온 과정이 어떤 고전적인 균형, 또는 대지에 뿌리박힌 무슨 근거 같은 것을 일단 잃어버리고 거기에서 다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그런 혼란이라고 보는 것이 나의 근본적인 비전이었기 때문에, (...)" (81)


"내 소설에서는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프로이트 전기적인 것하고 후기적인 것, 또 어떤 의미에서는 프로이트적인 것하고 프롬적인 것 두 개를 다 씨아질하려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독자들에게는 좀 죄송한 말씀인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방황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면이 있었습니다." (87)


광고 문화: 최인훈은 '문화'를 두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는 단독으로 쓰이는 '문화'의 개념이며 둘째는 정치문화, 경제문화 할 때의 '문화'다.

"앞의 것은 상대적으로 굳어 있는 사회 구조에서의 '문화'의 존재 형식, 혹은 사회적 행동에 대한 분류 형식"이자 사회의 다른 부분과 분리해서 의식하고 있는, 필요에 따라서는 '소비재'처럼 밖에서 접근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뒤의 것은 "'변화'라는 것이 통상화된 사회에서의 '문화'의 존재 형식, 혹은 사회적 행동에 대한 내면적 파악을 나타내기에 어울리는 용법"으로, 어떠한 인간 행위도 가공해 내는 '인간 주체의 내적 주체성'으로서의 문화이다. 정치나 경제와 같은 영역 속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극의라는 의식: "에누리 없이 말해서 인간은 어느 시대의 어떤 환경에서든 자기 삶의 끝까지 가려고 들면 대뜸 자신이 신화의 주인공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보통 자기라고 여겨오던 존재는 실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진실한 자기는 어떤 신화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에서 이런 각성의 국면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 쓸모없는 파멸이라는 것은 무능을 말하지만, 의미 있는 파멸이라는 행위에는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재능 있고 성실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것을 우리는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게다가 마음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된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것일까. 우리 자신의 상황을 알아보는 것일까. 우리 자신의 환상의 삶을 알아보는 것일까." 121-2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개화 이후의 우리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것들 과학·정치제도, 그들의 종교 같은 것들이, 마치 그것들을 알기 전의 우리 삶에는 끄트머리도 없던 것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조상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무엇을 가져다줄 것처럼 생각해왔다. 마치 유한을 넘어선 무한과 같은 것을.

그러나 섭섭한 일이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백인들의 그 학문·예술·종교 들도 모두 우리의 옛 삶과 다름없는 유한 속의 제상諸相이었던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유럽의 문명과 만난 모든 비유럽권이 고통을 겪으면서 배운 진상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서양에 대한 동양이라든가, 중국에 대한 우리 역사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다 알고 나서 우리가 역사의 어떤 시기에 얻었던 문명 감각─인간의 삶에는 절대적 차이는 없다는 것,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그런 차별은 없다는 점─이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어왔다. 익엇을 다른 말로 종교 감각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130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미국 뉴욕 공연: "우리가 서양 예술에 대해서 아마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데 비해서 서양 사람들은 자기들 이외의 문화에 대해서 너무나 모른다. 양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문화를 보편적인 것이라고 느끼고 싶어하는 데 비해서 서양 사람들은 자기 밖의 것을 내면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덜하다." 146


『광장』의 이명준, 좌절과 고뇌의 회고: "당시의 소박한 감각적 해방감의 차원을 넘어서 사태의 진상을 오늘의 눈으로 바라보면 해방의 그날에 이미 비극의 모습은 뚜렷하였다. 우리 국토는 두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국제적 승인을 가진 정통적 망명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 국토에 진주한 미·소 양측 군대는 자신들의 군사행동을 적지에 대한 '점령'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점렴군' 밑에서의 정치 질서는 군정이며, 우리 민족이 '일제군정' → '미군정' '소군정'이라는 질서에 넘겨진 것이 상황의 본질이었다.

2차 대전에서의 프랑스의 '해방'의 의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해방에 미친 프랑스 망명정부의 군사적 실력이 비록 미미한 것이었을망정, 망명 정부는 공동의 승리자로서 조국의 해방에 참여했다는 국제법적 지위를 가지고 조국에 돌아온 것이다." 178

(터키는 그렇다고 해도....)

"개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여태껏 자기라고 동일시했던 인격을 어떤 이유에서건 상실하면, 집단 인격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즉 방향 상실, '혼란'이 일어난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수립까지 남한에서 일어난 정치 현상은 이러한 혼란의 수습 과정이었다.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가장 좋았고, 미국의 뜻이라는 타인의 뜻에 의해 창조된 혼란이었다." 180

"인간은 온갖 종류의 좌절에서 해방될 수 없다. 다만, 목숨이 있는 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예술도 이러한 다시 시작하기의 한 방식이며, 훨씬(현실 행동보다) 철저하게 좌절하면서 그 좌절을 동시에 자기 성찰의 거울로 삼을 수 있다." 192


도버의 흰 절벽(영화): "그것은 한 사회의 견고한 연속성에 대한 부러움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감정이다. 현대 한국인이 보낸 격변하는 사회 질서에 비한다면 거의 자연 자체처럼 튼튼하다고 할 만한 사회 질서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근래 백여 년 동안 어제의 법이 오늘도 유효하고 내일도 유효하리라는 감각과는 상관없는 부평초 같은 사회생활을 해오고 있다." 204


예술이 추구하는 길: 예술은 상상의 부분(꿈)과 현실의 부분

"예술이라는 꿈은 이와 반대로 계획된 꿈이기 때문에 예술가는 몇 번씩 고치고 연구해서 완전한 꿈을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꿈꾸는 기술은 예술의 역사라는 형태로 진화하고 축적되기 때문에 예술가는 전통의 지혜를 원용할 수 있다. 예술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꿈─즉 개인적 꿈이 아닌 사회적 꿈이다. (...) 다음에 예술은 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적어도 예술을 감상하는 동안에는 현실 의식을 전적으로 배제하기로 약속하는 행동이다. 여기서 현실 의식이라는 것은 사실 상상 의식과 양립할 수 없다. 사람은 꿈을 꾸고 나서 깨어나는 것이지, 꿈을 꾸면서 깨어 있을 수는 없다." 219-220

"예술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인생과 역사에는 불가능이라는 한계가 있다. 예술은 환상이라는 형태로 이 불가능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 행동이다." 220


예술이란 무엇인가: 도식에 의한 설명. 인간의 생물적 자기동일성은 문명이 누증함에 따라 변화하는데, 원의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미지의 것들이고 여기서 공포와 불안이 생겨난다. 이런 공포와 불안은 동물들이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데, 인간의 그것들은 생물적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것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예술은 그 형식(상상력)에서는 같고 현실과의 관계(+, -_에서는 다른 것입니다." 240 -> 종교는 상상력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현실로 주장하고, 예술은 이를 약속된 환상으로만 주장한다는 차이가 있다.


"예술품이라는 것은 이처럼 공상적으로 무한 진화된 어떤 종의 계통 발생의 DNA인 셈이며 그런 예술품을 만든다. 감상한다는 것은 그런 DNA의 인공 조립, 자기 속에서의 그 DNA의 개체 발생 조작인 셈입니다. (..) (문명 in은) 양이 증대하면 질도 증대한다 이런 관계에 있는데, i(글꼴이 다름)n들은, 즉 예술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들은 유한수가 아닌 무한이므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등부호로 연결된다. 

"해와 십자가면 십자가, 불상이면 불상, 나타내는 모양은다르지만 두 가지가 그런 얼굴을 가지고 나타내려고 하는 내용의 질량은 같습니다. 원시인이 섬긴 신은 지금 우리가 섬기는 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245-6


"예술이라고 하는 행위는 인간의 진화의 과정을 환상적으로, 즉, 상상 속에서 완성해보는 특별한 인간 행위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247


.길에 관한 명상: 최인훈은 '길'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향하는 곳이며 길은 말과 진리로 연결된다. 짐승과 다르게 인간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짐승들과 공유하는 길로, 자연의 몸의 길이다. 두 번째는 말을 통해 형성된 지식의 길이다. 보통 이 길은 지식이나 과학, 기술 따위로 불리며 첫 번째 길을 개선하는 도구로 쓰인다. 마지막 길은 환상의 길이다. 이 길은 종교나 예술로 불린다. 세 번째 길은 첫 번째 길과 같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고 두 번째 길과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세 번째 길은 '해결' 그 자체다. "다만 그 '해결'은 환상의 해결이다. 마음속의 길과 마음속의 지도를 현실의 길인 양 걸어가는 환상이다. (...) 인간은 그 길 위에서 또 자기 길을 가고 있는 2차적인 존재이다. 그런데도 그가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를 제1차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 2차적 존재가 자기 자신을 1차적인 존재로 착각할 수밖에 없는 이 근원적인 모순의 길이 표현되는 방식이 예술이나 종교라는 환상이다." 258


만나기 위한 기다림: "문화는 인간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숨과의 사이에 언제나 끊김과 부대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화의 형식이 아니고는 목숨을 살지 못하는 데까지 이미 진화해버린 존재들이다." 277

"이 극의 주인공들은 목숨의 바람에 따라 만났고 다시 만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문화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 (...) 벽을 허문다는 것은 자기를 허문다는 일이 되고 자기를 고쳐 만든다는 일이 된다." 277


기억이라는 것(김인호와의 대담): "김 -선생님은 조명희의 정신이나 『회색인』에 나오는 김학의 정신을, 즉 어느 한편의 마음에서는 혁명을 오랫동안 꿈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화두』에서 많이 정리되고 가라앉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나야 혁명을 환상으로 꿈꾸었죠. 또 그 환상은 환상인 대로 환상에 값할 정도로 깊이 있게 현실 사회에 다가가 눈뜨고 지켜보아야 했지요." 331

 "문학에서의 '사랑'은 현실 생황에서의 사랑이 아니고, '혁명'은 현실에서의 혁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상징으로 읽힙니다. 『화두』에서의 중심 상징은 '기억'입니다. 이때의 기억은 사랑이기도 하고, 혁명이기도 하고, 그렇게 알고 썼습니다." 332


작가와의 대화(이태동과의 대담, 2007) : 가면고, 1960년 7월 발표, 광장보다 앞섰다. 


"제가 작가가 되고 싶어 데뷔를 꿈꾸던 시절 당시 한국 문학을 읽으면 유난히 농촌소설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소설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농촌에 관한, 농민들이 등장하는 농촌소설인 겁니다. 그래서 아, 소설이란 것은 농민이 등장하고, 필연적으로 가뭄이 발생해 괴로워하거나 지주와의 알력 싸움을 다룬 것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371 ㅋㅋㅋ농촌소설..터키도 똑같을걸..


"관념적인 비유를 통해 제가 작품에서 말하고 싶던 것은 결국 한 인간의 인생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대 가치는 본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는 겁니다. 본체와 외관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고대 동서양의 사고가 큰 차이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373


가면고의 반복성.

"참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자기 발견을 추구하는 존재론적 화두를 현실에서 풀고, 무의식의 세계에서 풀고, 토막으로 삽입된 에세이에서 풀고, 또 무용 각본 테스트를 통해 네 번이나 반복한 형식을 취했습니다." 379


 두만강에서 바다의 편지까지(연남경과의 대담, 2009):

"E. H. 카가 이야기를 했는데 보통 의미의 역사라고 하면 중요한 인물, 중요한 사건만 말하는 거죠. 지난 백 년 동안의 모든 인물과 모든 사건이 나온 건 아니잖아요.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만 봐도 소설과 역사가 다른 건데, 이제 말한 내 소설에 그런 것이 다 나오는 것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주인공하고 주인공이 처해 있는 사회적 문맥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문학 의식의 표현이겠지요. (...) 그래서 후반기에 와서는 아예 인물화를 그리는데 모델을 놓고서 캔버스가 있고 일부러 모델료를 지불하고 그릴 필요가 뭐 있나. 그 모델 자리에다가 큰 거울을 갖다놓고 자기를 그리는 거죠. 그림 그리고 있는 자기가 비춰질 거 아녜요? 그러니까 쓰는 자기 이야기를 쓰는 소설이다. 결국 소설이 거기에 낙착하더라 그거죠. 그게 『화두』다 그거죠. 그래서 『태풍』에서 『화두』에 이르기까지, 그런 결단을 내리기에 근 20년이 걸린 거죠." 403-4


"자기 반영적인 소설 『화두』를 통해서 이전 작품들과의 맥락을 찾는 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광장』의 이명준이 「구운몽」에서 관 뚜껑을 열고 환생하고, 『회색인』 『서유기』 연작에서 독고준이 되어 역사를 탐구하고, 『태풍』에서 오토메나크가 되어 진정한 독립과 화해를 이루게 됐다는 거죠. 이렇게 『화두』의 '나'가 경험한 식민지 체험,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현실을 겪은 인물들이 서로 공통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대화하며 시대적 요청을 풀고자 하는 상호 텍스트적 연결로 읽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 그렇겠지요." 416


이명준-독고준-김준구-구보-백골로 이어지는 역사의 바다....


해설/ 김태환, 문명의 불안─최인훈의 예술론에 대한 소고

"우리의 삶이 확고부동한 대지 위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최인훈의 문학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 "그것은 한 사회의 견고한 연속성에 대한 부러움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감정이다. 현대 한국인이 보낸 격변하는 사회 질서에 비한다면 거의 자연 자체처럼 튼튼하다고 할 만한 사회 질서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근래 백여 년 동안 어제의 법이 오늘도 유효하고 내일도 유효하리라는 감각과는 상관없는 부평초 같은 사회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에 비한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인간이 만든 사회도 산이나 강처럼 버티고 있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법과 질서를 앞산과 뒷산처럼 영원한 것으로 느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204재인용) . 446


"청년 루카치가 서양 근대문학의 상황을 '초월적 지붕의 상실'로 규정하고, 갈 길을 알려주는 천공의 지도가 사라졌다고 한탄한다면, 최인훈은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는 듯하다. 너희들에겐 지붕이 사라졌을지라도 여전히 단단한 대지가 있지 않느냐고, 견고한 건물과 도로, 뒷산과 같이 영원하게 느껴지는 이 세상의 법과 질서가 있지 않느냐고." 447

"여기서 주목할 것은, 최인훈이 작가로서 느끼고 있는 이러한 공포, 불안의 상태가 다른 작가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조건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 그러면 왜 최인훈에게는 불안정에 대한 의식이 그토록 첨예하게 발전하였는가? (...) 해방 이후 고향 회령을 떠나 원산으로 이주할 때부터 그와 그 가족의 삶은 유난히 심각한 '뿌리 뽑히기'의 연속이었다. 그가 다양한 기회에 술회한 가족사를 살펴 보면 삶의 규칙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는 바람에 그때까지 겨유 세상에 적응하여 쌓은 가치가 하루아침에 부정되거나 반가치로 돌변하는 경험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의 가족은 결국 '움직이는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 땅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하지만 최인훈은 한국에 남았다. 작가로서 그는 남의 땅을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대지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다." 4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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