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독고준(국문과, 소설가 지망생)의 하숙집으로 찾아가는 친구 김학(정치학과).

초반의 역지사지...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제국주의를 대외 정책으로, 민주주의를 대내 정책으로 쓸 수 있었던 저 자유자재한, 행복한 시대는 영원히 가고 우리는 지금 국제 협조, 후진국 개발의 새 나팔이 야단스러운 새 유행 시대에 살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거름으로 써야 할 식민지를 부앙천지 어느 곳에서 손에 넣을 수 있으랴. 그러나 식민지 없는 민주주의는 크나큰 모험이다." 11


"아무튼 우리가 알기론 요새 문학이란 것도 우습더군.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시공의 좌표가 부재란 말야. 한국인의 정신 풍토는 나침반과 시계가 없는 배 같은 거야. 그 시간이 그 시간, 조금도 다름이 없어. 어쩌다 소설을 읽어봐도 조금도 사무치지 않아." 13


16-17 서양의 문화적 우월성이나 탄탄한 역사를 묘사하는 장면. 우리에겐 그게 없다? ... 

"한국의 문학에는 신화가 없어. 한국의 정치처럼 말야. '비너스'란 낱말에서 서양 시인과 서양 독자가 주고받는 풍부한 내포와 외연이 우리에게는 존재치 않는단 말이거든. 서양의 빛나는 시어나 관용어들이 우리의 대중 속에서 매춘부로 전락하는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어. (...) 우리들에게 있어서 서양은 매춘부와 같고 선인들은 물귀신 같애." 16-17

"저들은 낡은 신화를 부수고 새 신화를 세우기 위해 시를 쓰지만, 우리에게는 부술 신화가 없고, 서양의 그것은 서양 시인들이 부술 것이며 동양의 그것은 이미 폐허가 돼버렸으니 부술래야 부술 수 없어. 우리들은 패배한 종족이야. (...) 동양은 백인들의 노예로서 세계사에 끌려나왔어." 18


토지개혁 이듬해에 월남한 아버지와 매부, 남은 가족들 특히 준은 학교에서 부르주아 집안 자식으로 매도당해 선생에게, 동무에게 괴롭힘을 받았다.


"이광수의 임은 민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민족 같은 것을 업고 나설라치면 단박 바지저고리 소리를 들을 테니 이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세대."40


"민족의 일원도 국가의 일원도 그리고 가족의 일원이기도 전인 '자기.' 그는 이 발견에 몸이 으스스하도록 감격했다." 41


"사과는 지게를 지고 걸어가던 늙은 농부의 어깻죽지를 때리고 땅에 굴렀다. 겁에 질린 농부의 얼굴이 차 위를 살폈다. 그 옆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실은 차가 지나가면서 몇 알의 사과가 더 날아갔다. 농부는 길가에 모로 돌아서서 그것을 피했다. 처음 사과 한 알이 날아가는 순간 준은 가슴이 꽉 막혔다. 그의 눈앞에서 병사는 거푸 두 번 세 번 던졌고 순식간에 농부는 저 뒤로 남겨졌다. 준은 웃고 있었다. 병사들이 유쾌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닮았던 것이다. 그는 몰래 차를 얻어 타고 있었다. 그는 표정으로나마 맞장구를 쳐야 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슬픔과 아까 군가를 들으면서 느꼈던 것보다 비할 수 없이 강한 고독으로 울렁거렸다. (...) 준이 탄 차 바로 옆에 두 구의 시체가 넘어져 있었다. 시체는 인민군 병사였다. (...) 앞뒤 차에서 사과가 날아가서, 시체 위에 혹은 옆에 떨어졌다. 진흙 속에 박히는 사과를 바라보면서 독고준은 웃고 있었다. 차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닮기 위해서." 72-3


"이런 자리가 만일 이 인생에 있다면 나는 그것을 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보기만 하는 생활. 한없는 욕망을 간직한 채 인생의 밖에 서 있는 몸가짐." 75

"게다가 남한 사회는 한국이 여태까지 겪지 못한 새 사회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돈이면 그만인 사회. 적당한 겉치레와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전통도 없는 채 자본주의의 가솔린 냄새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속에서 그는 낙오자가 되었다." 77


"녀석은 혁명을 하자는 것일까. 이 삼천리 금수강산을 유토피아로 만들자는 것일까. 바보 자식. (...) 이 땅은 구조할 수 없는 땅이야. 한국. 세계의 고아. 버림받은 종족. 동양의 유대인." 83


"지금의 독고준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언젠가 한 번은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 고향에 가서 일생을 묻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봐야 그곳은 옛날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풀피리는 쓰디쓸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한 번 가고 싶다. 그 쓰디쓴 풀피리를 불기 위하여. (...) 그러나 그곳엔 언제 갈 수 있는가. 사랑과 시간이 해결해줄 것인가. (..) 그래서 형님과 어머니와 누님에게 우리들이 그 하고많은 밤의 굿을 치르며 그리워하고 그곳에서 살고지라 빌었던 귤이 무르익는 남쪽 나라는 와보니 있지 않은 허깨비더라는 것, 따라서 그 목소리 곱던 아가씨는 거짓말쟁이라는 것, 누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제일 훌륭한 남자라고 여겼던 사람은 치사한 녀석이더라는 것-이 모든 얘기를 그 사람에게 해주어야 할 것이 안닌가. 그러나 그런 날이 올라구.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다. 다른 누가 와서 또 한 번 겁탈하는 것을 기다리는 실성한 갈보처럼 우리 엽전은 언제까지고 임을 기다릴 것이다. 사랑과 시간. 엽전의 종교." 87-8


"누가 이 따위 엽전들을 위해서 혁명을 해줄까 보냐. 아까운 목숨을 걸자면 좀더 귀여운 사람들을 택해야지. 독고준 자네는 엽전 아닌가. 그러니까 엽전답게 목숨을 아낀단 말이다. (...) 그러니까 김삭 선생. 나는 당신이 좋으면서 싫어. 당신은 내 생활을 어지럽히니까. 되지도 않을 일로 슬픈 환상을 일으켜주니까. 김학 선생, 당신의 순정은 잘 알아. 그러나 난 엽전의 생리를 잘 알아. 내가 엽전이니까. 안 될 거야. 잘 안 될 거야. 실은 그게 아니야. 서양 아이들 등쌀에 제대로 되겠어? 그 애들의 거창한 힘과 겨룰 수 없어, 김학. 엽전답게 살지 않으련?" 88-9


갇힌 세대 동인의 친구 김정도(춘천), 김명호(김명식???? 서울내기??), 오승은(목포).

학은 경주 출신.


97-99 서양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절망이 없고, 피흘려서 자유를 쟁취해낸 것이 아니므로 서양만큼 주권의식도 없다. 등등등.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자기가 광대라는 그들의 분위기는 아슬아슬하고 숨차고 약간 아름답기까지 하였으나 그것은 다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을 알고 있었다.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아슬아슬함은 진짜 위험이 아니라는 것을, 그 감격은 환상이라는 것을, 그 긴박감은 에고의 초조라는 것을, 약간의 아름다움은 자기도취라는 것을 그들의 속마음은 알고 있다." 104

-그들이 아무리 갑론을박 하고 있어도 그들은 정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그것을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저 시들해질 뿐이라는 것을 안다. (이청준의 조율사 생각이 난다.)


"만일 초가지붕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만족지 않는다 치더라도,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려니 여기고 산다면. 그들의 정신을 깨워주고 더 높은 욕망을 가르쳐주는 것은 옳은 일일까. 그것이 옳다. 잠에서 깨야 한다. 비록 한때의 혼란이 있더라도 그들은 반드시 깨야 한다. 그 간소하고 겸손한 욕망의 버릇을 버리고 더 진하고 억센 욕망에 눈떠야 한다는 것이 계몽주의자들의 일관한 생각이었다. 아니, 문제는 그런 데 있지 않다. 남의 욕망을 깨우쳐준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는다는 일이 우리 세대에서도 청년의 자세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그게 문제다." 112


학의 꿈, 여자를 밀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학. "아무 증거도 남지 않는다. 할 것인가. 절대로 안전한 범죄다. 왜 안 해야 하는가." 117

왜 이런 꿈을 꾼 것일까. 왜 최인훈은 이런 꿈을 묘사한 것인가. 독고준을 끌여들여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꾼 꿈. 끌어들이는 것이 여자를 밀어버리는 완전범죄라면, 독고준은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죽음을 당하는 것인가. 오히려 고여서 썩고 있는 물처럼 되어간다는 것인가. 혹은 우리는 이런 토론을 한다는 것에 자위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약간의 자기만족을 하면서 그곳에 안위하게끔 해주기 떄문일까.


김순임 자매(전도사). 주인 내외, 영숙.


"그의 가족의 일부는 W시에 있고 일부는 서울 교외 땅 밑에 누워 있고, 그리고 독고준 나는 여기 셋집 2층에 쭈그리고 누워 있다. 그는 세 개의 점을 연결한 세모꼴을 만들어본다. 그 도형은 깨뜨릴 수 없이 든든하고 빛깔은 진해 보인다. 피와 추억과 사상과 약간의 증오ㅡ즉 과거라는 시간이 만들어놓은 허물지 못할 집이다. 자기의 에고를 뒤따라가면 가장 평범하게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이 한 권의 족보다. (...) 현대 한국인이 방황하고 자신이 없는 것은 어떤 '연속'의 체계 속에 자기를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25-6


"언제부터 이런 게으름이 몸에 배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오래전부터임에는 틀림없다. 할 수 없는 놈이다, 나는. 그는 자기 자신을 할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한다. 일요일의 인간. 영원한 일요일의 인간."


"물론 우리는 원주민이다. 우리의 정치 제도는 우리가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사못 하나도 발명하지 않았다. 지성인이기 위해서는 될수록 많은 외국어를 알아야 할 형편이다. 우리가 쓰는 일용품─정신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의 전부가 외래품." 128


129, 130 서양과 우리의 차이들. 우리의 예술은 로고스에 기반하지 않고 선禪의 미학 위에 있다. "그래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격이다." 130


독고준의 메모. "셰익스피어를잃느니차라리인 도 를 잃 겠 다 (...) 서양휴머니즘은존재했지만휴머니즘일반이란것은존재하지않았다." 131


"우리들 동양인은 그리스도교의 비유와 심벌이 가지는 미학적인 일반성을 역사적인 동시성으로 착각당해왔다. 불쌍한 정신적 강간. 영국 자본주의가 해외 식민지 경영을 통해서 자기 사회의 모순을 완화하고 위기를 넘어서고 활력을 찾은 것처럼, 서양 속에서 막다른 골목에 선 기독교는 선교라는 공간의 확대를 통하여 위기를 완화해온 것이다. 문제를 정직하게 정면으로 받는 대신에 그들은 시간을 번 것이다. 공간적 확대를 통하여. 우리 사회에 넘치고 있는 이 '심벌의 이중 구조' 때문에 문제는 자꾸 순환하고 고뇌는 비극의 표정을 이루지 못하고 끝없이 신파가 되고 만다. 서양의 언어가 우리를 정복한 것이다. 핏줄이 다른 언어를 (언어라고 얕보고)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그 언어 뒤의 역사까지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떨게 하지 않는다. 그는 나와 무관한 이방인이다. 그러므로 그와 나 사이에 드라마는 없다." 140


해양대학에 가서 해군으로 일하는 학의 형. 형의 동료가 요코하마를 포격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던 일화를 이야기해준다. 

" "(...) 그런데 욕망 가운데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게 있어. 돈을 벌겠다, 잘생긴 여자를 가지고 싶다 하는 건 개인적인 욕망이야. 그 혜택이 그 한 사람에게만 그치니까. 그러나, 어떤 인간이 자기 만족을 괴롭힌 외국의 항구 도시를 포격하고 싶다는 충동, 이 욕망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아. 그의 욕망에는 전체의 숨결이 쉬고 있어. 그를 유혹한 것은 전체였던 거야. 그의 경우에는 한국 민족이라는 전체가 그를 통해서 복수하려고 했던 게지."" 155-6


""여전히 세계는 집단을 단위로 움직이지만 옛날의 집단과 다른 것은 그것이 살아 있는 연속체가 아니고 무기물이 되었다는 점이야. (...) 종족이 개인의 신이요, 의지할 곳이요, 어머니의 품이었던 시대, 다시 말해서 내셔널리즘의 시대는 지나가버렸어."" 156


"우리 세대에는 내셔널리즘이란 일본에 대한 반항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밖에는 없고 긍정적인 면은 없어. 왜냐하면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야. 반항할 상대는 있어도, 사랑할 대상은 없었다는 것. 이것이 서양 내셔널리즘과 우리들의 것과의 틀린 점이지. 서양 사람들에게는 짓밟을 식민지와 사랑할 조국이 같이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사랑할 조국은 있으나 빼앗을 식민지는 없어. 그래서 우리는 조국 속에 갇혀 있어." 158



""글쎼 구식인지 뭔지는 몰라도 프로프즈하는 광경만 상상해도 소름이 쭉 끼쳐."

"순 병신이구나."

"그런데 영화 같은 데서 서양 사람들 연애하는 걸 본다든지 소설에서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거든. 그게 이상해."" 161


""다만......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기의 욕망이 어디까지 '나'를 죽인 것인가를 잘 계산해보라는 거야. 우리 시대는 유관순의 시대가 아니야. 요코하마를 사격한다는 생각이 광대의 환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시대야. 전체에 사로잡힌 열병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아무도 동정 않는 일이 되고 말았어. (...) 그러니까 우리가 더 확실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아끼자는 거야."" 173


"형은 가장 아픈 데를 찔렀다. 독고준과 나의 차이는 현재로서는 의견의 다름뿐이다. 다만 생각의 차이.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해야 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혁명. 혁명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파멸로 향해가면서도 정작 목숨을 새롭힐 손은 쓰지 못할 이상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인가. 한 그루 연꽃조차 키우지 못할 이 괴상한 진흙탕.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괴시는 고향의 밤이, 어떤 시대의 젊은이에게는 차라리 반역하고 싶은 아픔일 수도 있다." 174


1959년 2월. 2.4 파동.

매부 현호성을 찾아가는 독고준. 허탕 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김순임. 자신의 방에서 교리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는 준. "그는 그 일 이후에 어느 여자든 그 여름날의 여자와 비교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독고준에 대하여 그녀는 원형이었다. (...) 지금 눈앞에 앉은 여자도, 그의 원형과 비슷하다는 착각에서 그는 온 하룻밤을 그 생각으로 새웠던 것이다." 196-7

"이 여자는 어딘지 김학이 놈과 비슷하다. 어마어마한 말을 순진스럽게 입 밖에 내는 점이 닮았다. 김순임. 이름도 좋아. 이 여자의 몸은 어떨까? 아마 몸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처녀일는지도 모른다. 희한한 보물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준은 그녀의 가슴을 힐끔 내려다봤다." 199


황 선생

""그러니까 한국이 제일이라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한국이 제일 못난 것은 아니란 이야기야. 못나고 잘나고는 그렇게 쉽사리 따져지는 게 아니라는 말일세. 요즈음 청년들은 너무 자기를 괴롭혀. 그리구 너무 초조해."

"그러나 선생님,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사방이 막힌 우리 안에 갇힌 짐승 같습니다. 여기도 벽, 저기도 벽입니다. 갇혀 있는 게 우리 세대가 아닙니까?"

"그 감옥을 부수려고 왜 버둥거려보지 않나? 갇힌 것은 자네들만이 아니야. 자네들 앞 세대도 그랬고, 또 그 앞 세대, 도대체 갇히지 않은 세대가 어디 있었겠나."" 207


종교의 문제. 

""자본주의 사회는 종교를 정치에서 떼어놓음으로써, 악에 대해서 책임을 벗을 수 있고, 부단히 현실의 국가를 비판할 수 있는 자리를 유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218


황 선생의 부분을 집어 넣은 의도는 무엇인가.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야. 재미있었어. 학은 손톱을 깨물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227


일본에 다녀오는 현호성. 독고준이 그의 집에 들어와서 살기로 함. 동경서 처제를 데려오는 길. (김두수와 이미지가 좀 겹치는 것 같기도..) 


""한국의 경우에는, 신은 죽었따, 그러므로 자유다, 하는 생각은 근거 없는 유행가다. 서부 활극의 호남아들이 우리 눈에는 아무래도 서먹한 친구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근대 선언은, 가족은 흩어졌다(혹은 없다), 그러므로 자유다, 하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233

그림을 그리는 이유정.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 


"무엇을 위한 전위입니까? 누구에 대한 레지스탕습니까? 정립이 없는 반정립. 우리 예술 풍토가 그래요. 이건 이국취미치고도 가장 나쁜 것이죠. 이국취미는 그 땅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요. 그 땅에 가보고 싶다는 것. 그 예술을 생산한 풍토와 인간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래서 미국이나 프랑스에 갔다 온 사람들이 어떻게 했나요. 한국 사람으로서 자기 주체를 반성한 사람보다도, 그쪽의 시민권을 얻은 데 만족한 사람이 더 많은 게 사실 아닙니까? 외국서 돌아온 예술가들은 미국 문학의, 프랑스 문학의 선전원 자격으로 돌아온 것이지 한국 문학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마음먹고 돌아온 건 아니죠. 그러니까 이 꼴이 아닙니까? (...) 마치 오늘날 한국 정치가 외국의 영향을 배제하고 자주 독립하라는 게 무리고,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밭이 되라는 게 무리인 거나 마찬가지죠." 238-9


""반항이라면 전통의 무기를 거꾸로 쓰는 걸 말하는 것이지, 신무기를 쓰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건 끊어지는 거지, 반정립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춘향이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한국 문화가 서양 문화를 몰아세울 앞날이 있는가? 난 없다고 봅니다. 춘향이는 어차피 파마를 할 것이고. 자동차를 타고, 끝내는 재즈에 춤추고, 급기야 이몽룡과의 사랑에도 권태에서 오는 저 무서운 사랑의 파국을 겪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흐름입니다. 발상의 고삐야 누가 가졌든 게임의 승패는 분명해요."" 240


"우리는 서양 친구들이 밀어놓은 바윗돌을 밀어 올리는 작업에 동원된 일꾼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나마 바위에 손대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시시포스의 엉덩이를 밀고 있을 뿐이다. (...) 우리는 '시시포스의 엉덩이 밀기꾼'쯤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괴로움은 시시포스의 고결한 고통과 수난의 얼굴을 닮지 않고, 늘 어리둥절하고, 환장할 것 같고, 겸연쩍고, 쑥스럽고, 데데하고, 엉거주춤한 것이다. (...) 동포여. 사랑하는 겨레여. 우리는 '영웅'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아니다. (...) 우리들의 바위.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우리들의 착각일 뿐이다. (...) 그러나 우리가 손을 댄다고 해서, 또는 안 댄다고 해서 사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할 일? 그런 건 없다. 없는 것이다." 245-6


학과 김순임, 준을 찾으러 왔다가 허탕치고 둘은 영화 보러 가다. 

독고준의 사랑의 방식, 그저 옆자리를 채울 누군가가 있으면 되는 것 같다. 김순임에서 이유정으로, 같은 자리에 놓인 대상만 바뀌었을 뿐.


계속 소설을 쓰고 있는 독고준. 259


"그러나 한 번 도식을 만들어놓으면 사람은 그 값으로 에고를 잃는다. 에고는 보편의 바다에 빠져서 없어진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그것은 퇴화다. 보편과 에고의 황홀한 일치. 그것만이 구원이다. 어떠한 이름 아래서도 에고의 포기를 거부하는 것. 현대 사회에서 해체되어가는 에고를 구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는 작가의 임무일 것이다." 271


"그는 창가에서 조금 비켜섰다. 유리에 얼굴이 비쳐 있었다. 그는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유리 속의 남자의 눈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누구냐 너는 그것을 나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나는 모른다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서 대답을 들을 때까지 너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면 이러긴가 나는 그런 사랑을 원치 않는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할 수 없다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에 나는 있다 나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네가 가장 열중한 순간에도 너의 등 뒤에는 내가 있다 너는 없다 너는 나의 그림자다 그렇지 않은 줄 번연히 알면서 앙탈하지 말라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당장 대답하라는 것도 아니지 시간은 있다 다만 그 시간들을 허비하면 안 돼 우리는 타협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나도 그 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전례가 있지 않은가 그건 번번이 실페하지 않았는가.

독고준은 돌아섰다. 유리 속의 남자도 돌아섰다. 이런 대화에 준은 익숙해 있었다. (...) 나의 감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나의 일을 한다." 280-1


아프리카 특집인 미국 잡지를 읽으며 자신의 내면에 잇는 서양인의 시각을 포착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독고준. "준은 어떤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아프리카상은, 서양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이었다. 영화와 소설과 신문이 제공한 그 이미지들은 그렇게 이해성이 없고 무책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작가의 손으로 된 짤막한 단편소설에는 사랑이 있었다." 283


"그러나 독고준이 더 씁쓸하게 생각한 것은, 한국 사람인 자기가 서양 미술사의 시점에서 이 이방의 미술품에 놀라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서양 사람처럼. 이러한 기묘한 인식의 우회. 그것은 물론 나의 책임이 아니다. 몇 세기 전에 서양 사람들이 무슨 발광이 나서 아프리카에 갔던 김에 그곳의 미술픔을 갖다가 박물관에 벌여놓고 그것을 피카소나 누구가 보았다는 것은 내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284


독고준의 독백에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한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고,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왜 반복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가? 누가 그에게로 책임의 화살을 돌리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책임이 없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인이라는 것과 한국인이라는 데는 무슨 차이가 없다. 다를 것 없는 원주민이다. 옐로 니그로. 그것이 우리들의 초상이다." 287


"우리가 서양 사람들에 대한 집단 열등 콤플렉스를 넘어서자면 이번에는 우리가 그들을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대를 사는 세대는 앙앙불락할 수밖에 없다. (...) 원주민이기를 거부하자면. 기린이 되지 말자면. 보호구역의 주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춘향전』이 승리할 가망은 없다. 그렇다고 남의 다리를 긁을 것인가. 아니. 훌륭한 서양 사람은 남의 나라의 자연 자원까지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 내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이야 어찌되었든 사실은 내 본심은 아랑곳없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고전적 생활의 질서가 아직 잡히지 않는 이 시대가 우리에게 착각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을 혁명가로 만드는 것이다. 혁명가가 만일 실연한다면? 그의 정부가 그에게 무슨 소용인가.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랴? 이 시대는 천하를 구해야 영혼도 구할 수 있느니라? 이 말 속에는 어딘지 수상한 데가 있다. 천하를 구한다는 건, 우리도 빨리 서양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양 사람도 될 수 없다. 우리가 서양이 됐을 때는 서양은 다른 것이 돼 있으리라. 또 그 꼴이다. 그런 속임수에 자꾸 따라갈 게 아니라 주저앉자. 나만이라도. 그리고 전혀 다른 해결을 생각해보자. 한없이 계속될 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단번에 역전시킬 궁리를 하자. 그러니까 거북이는 기를 쓰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먼저 주저앉아라." 288-9


"나는 회피하는 것인가. 그렇다. 회피하는 것이다. 정치의 악을 '에고의 사랑'으로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을 나는 거부한다. 그것은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다." 289


"준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참 만에 빙글비을 돌아가는 머리를 두 손으로 짚으며 그는 2층 계단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올라갔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는 개다. 나는 개다......" 308


p면에 산다는 조부뻘 되는 분을 만나뵙기 위해 길을 나선 독고준. "내 조상도 이 마당에서 팔자걸음을 옮겼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뿌듯한 감회를 느꼈다. 참으로. 참말 할 수 없는 것인가 보지. 인간은, 평범한 인간은 역시 전통의 품에 안겼을 때가 제일 푸짐한가 보지." 318


"노인은 숨소리도 없다. 적막강산. 문득 준의 가슴에 그런 감회가 소리 없이 오갔다. 순수한 슬픔. 허전함. 그리고 정반대로 기쁨 같기도 한. 어떤 새도마조히스틱한 심정이 환한 대낮의 공간 속에서 울렁거렸다." 322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마지막으로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하루의 항해는 소득 없이 끝났다. 보물섬은 적힌 좌표 위에 있지 않았다. 그저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정도의 보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값진 항해였다. (..) 그것도 아니었으니 필경 화려한 족보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화려해봐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취도 없어졌다는 건 좀 너무하구나. 독고란 성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기회가 있으면 한번 조사해봐야 하겠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일이었어." 328-9 


일가와 가문, 가족, 족보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독고준. 그의 이전까지의 태세와 좀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그의 심리. 

"왜 그런지 오늘 하루의 여행을 말하고 싶지 않다. 무슨 구원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용기가 모자란 것인가 내 속에 자라는 그 모양할 수 없는 부스럼을 어느 누구에게 옮겨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비애 너는 모양할 수도 없도다 너눈 나의 가장 안에서 살았도다 너는 박힌 화살 날지 않는 새 나는 너의 슬픈 울음과 아픈 몸짓을 지니노라 너를 돌려보낼 아무 이웃도 찾지 못하였노라 은밀히 이르노니 행복이 너를 아주 싫어하더라 너는 짐짓 나의 심장을 차지하였더뇨?" 333


독고준의, 자신의 이빨은 바람만을 씹는다며, 여자들도 씹지 못하고 무력하다 자신 속에 움튼 부스럼은 방공호의 여자로부터 얻었고 "곪지도 터지지도 않고 그저 저리고 쑤시는 부스럼이다 이 아픔을 잊기 위하여 나는 이빨을 세우고 먹이를 찾은 것이다." 334



13장, 자신을 드라큘라로 보는 독고준. 

당구실로 들어가 혼자 당구를 치는 독고준, "벽에 붙어서 의자가 세 개 놓여 있다. 그 의자에 방금까지 누군가 앉아 있었던 것 같은 환각을 느낀다.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강해야 한다. 최소한 나의 에고는 지킬 수 있도록. 태연한 낯빛으로 약간 웃음 띠고 신 없는 고독을 견디어내기만 하면. 족보 잃은 외로움을 견디어내기만 하면 새 태양을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 대에. 그 전에 고꾸라지지만 않으면. 아주 질긴 신경을 가지고 탐욕스럽기 때문에 절약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기로 하면서." 354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고 모든 것은 사랑과 시간이 해결할 것이라고 말하던 그는 사실 누구보다도 그 족보 없는 시간들을 괴로워하고 있는 듯하다..


"드라큘라 전설을 거꾸로 이해하게 된 인간은 김순임 같은 애를 다쳐서는 안 된다. 신이라는 완충기를 잃어버린 사람. 족보라는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자동차는 꽃밭에 방향을 돌려서는 안 된다. 강해야 한다. 그런데도 마음은 허전했다." 355


"정통의 악마를 끝내 찾아내기나 한 것처럼 웬 수선이었을까? 사람은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기로 하자. 정통은 없다는 것. 족보는 불타버렸다는 것. 돌아갈 고향은 없다는 것. 이것이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저 많은 사람들. 거짓말 족보를 끼고 거리에서 성혈을 보리냉차처럼 파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 참다운 용기 가진 사람이다. 그들은 두려운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어차피 멸망할 사람들이 아닌가. 밀정을 피하는 지하 운동자는 편의를 위해서 피하는 것이지 자기가 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충격을 받은 건 오랜 습관이 시키는 노릇이리라. (...) 나는 범인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 359


"돈키호테는되지않겠다는것선교사부인을흉내내는원주민아가씨는되지말자는것이내결심이아니었나─빌어먹을이놈의세상을살자면함정투성이구나그런데나는그걸할뻔했으니천만의말씀이다드라마여안녕난그런각본에끼지않는다."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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