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 태식- 색소폰. 오누이. 부르주아의 집안 아이들.


"언제부턴가 그런 복 받은 사이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 그런 사이를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52


남산을 오르다 스쳐 지나가는 권투선수를 보며 태식, 

""고독해서 저러는 거야."

명준은 아찔하다. 권투선수와 고독을 한 줄에 얽는 태식의 그 말이 그대로 안겨온다." 53


강윤애

명준이 여성을 보는 시선 "그러자, 저녁에 만난 영미의 친구 강윤애의, 턱언저리가 몹시 고운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그 얼굴은 대어들 듯 웃고 있다. 나긋나긋하던 그녀의 허리 어림이 아직 손바닥에 있다." 57 내면이 아니다. 외적인 여성성들.

"무슨 얘기를 한담. 사랑합니다. 영원히? 사랑이니 영원에 대하여 꽃집 진열장에 놓인 외국 종자 화분 보듯 가지고 싶다는 마음밖에는 마련이 없는 그녀들과 걸음이 맞을 수 있을까. (...) 여자도 남자하고 자고 싶어 할까. 명준에겐 그게 제일 궁금하다." 57

"여자란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짐승 같다. 남들이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식의 허영을 그녀들의 지나가는 조잘거림에서 깨닫는 수가 적지 않다. 그녀들에겐 사랑도 치장일까. 명준의 이런 여성관은 오랫동안 그녀들의 낯빛과 말이며 움직임, 다음에 소설의 여주인공들을 뜯어본 다음에 얻어진, 찢어지게 가난한 열매다." 58


정 선생을 만나고 오후엔 강윤애를 보기로 한 명준. 여자 미라를 봄.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의 공공재들을 자신들의 밀실에 가져가서 꾸미고, 꽁꽁 숨겨놓는 것들


"아버지 이름이 놀림을 받는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태어나는 것을 알았다." 83

월북한 아버지때문에 형사실로 끌려 와 수난을 겪는 명준. 인천의 윤애 집에서 신세지게 됨.

"윤애한테 말하지도 않고, 혼자서 곧잘 거리를 걸어본다. 부두를 낀 거리를, 맥고모자를 눌러쓰고 기웃거리는 시간에, 그는 즐겁다. 윤애도 없고, 때리던 형사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에서, 얼음에 잠긴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저 때를 보내는 게 좋다." 90

사실 윤애든 뭐든, 명준은 자신의 밀실에서 내면으로 침전하는 것을 제일 좋아할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무도 없는 상태. 자신과 연인 관계로 발전 중인 윤애와 자신을 때린 형사와 소식도 없는데 이름만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아버지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미묘함.

"흔히들 여자란, 남편이나 애인이 아닌 남자한테도 꼬리를 치는, 타고난 갈보라지만, 시시한 소리다. 여자보다 더 쩨쩨한 남자도 얼마든지 있다. 나 같은 놈이 바로 그렇다. (...) 남자들은 씩씩한 체하려고들 한다. 애인들 앞에서, 굳센 수컷의 맛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이 얼마나 모진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소뿔 끝에서 피를 뿌리는 스페인 사람들이 한다는 그 백정놀이에서처럼, 그들은 쓰러진다. (...) 나한테도 영웅의 삶을 살고, 영웅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씨앗이 파묻혀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이 검은 해가 비치는 어두운 광장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씨앗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내는 나팔수가 바로." 90-1

그도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스페인 사람처럼 영웅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영웅의 삶은 광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내는 나팔수의 역할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여기에는 여자나 애인들에게 수컷의 맛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한 남자의 모습이 있다. 치기어린 무구한 소년의 모습이라고 해도 될까.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건 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 속았다 하고 떼었다 할 때, 꾸어주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억지가 아닐까. '사랑'이란 말 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 그런, 잘못과 헛된 바람과 헛믿음으로 가득 찬 말이 바로 사랑이다. 어마어마한 그물을 얽어낸 철학자가, 늘그막에 가서 속을 털어놓는 책을 쓰는데, 그 맺음말에서 '사랑'을 가져온다. 말의 둔갑으로 재주놀이하는, 끝없는 오뚝이 놀음. 철학이란 그렇게 가난한 옷이었다. 윤애의 덤덤한 낯빛은, 관념 철학자의 달걀 이명준에게, 화려한 원피스로 차리고, 손이 닿을 거기에 다소곳이 선 '물자체'였다.

부드러운 살결이 벽처럼 둘러싼 이 물건을 차지해보자는 북받침이, 불쑥 일어난다." 92

이어지는 윤애와 명준의 대화에서 윤애의 대꾸에 알 수 없는 미움을 느끼거나, 그녀의 텅 빈 말을 가소롭게 여긴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묘사가 자주 눈에 띈다. "그 모양은, 여자의 벗은 몸을 떠올린다. 금방 물에서 나온 깨끗한 살갗의 빛깔과 부피를 닮았다. 어디서 봤던가 기억을 더듬는다. 영미였다. 그녀가 목욕을 하고는, 곧잘 그의 방 의자에서 농담을 하다가 돌아가곤 할 때, 보기가 민망하도록 곱던 살빛이다. 쓴웃음을 짓는다. 기껏해야 떠올리는 본이라고는 영미뿐. 초라해진다. 영미는 나한테 무엇이 되는가." 96

떠올릴 수 있는 여성의 육체가 영미뿐이어서 초라해지는 감정을 느끼는 명준에게 있어 여성은 많이 차지하고 많이 경험할 수록 자신을 멋진 수컷으로 만들어주는 미지의 짐승이다. 이후에 윤애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아 키스를 시도하는데,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에게 "명준은 노여움으로 온몸이 확 단다. 그는 감았던 팔을 확 풀면서, 그녀의 턱과 뒷머리를 거칠게 붙잡아,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누른다. 기다리기나 한 듯이, 곧,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부드러운 그녀의 혓바닥을 자기의 그것으로 느낀다." 97-8

"그는 그녀를 힘있게 한 번 가슴에 품었다가, 놓아줬다. 자리를 옮겨앉으면서, 흩어진 머리를 만지는 그녀는, 아주 가까워진 사람 같다. 사람이 몸을 가졌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하다. 사랑의 고백도 없이 이루어진 일인데, 어떤 대목을 빼먹었다는 뉘우침은 없다." 98

"그녀는 그저 갑작스레 당하고 만 것일까. 아니, 그녀의 혀는 토막 난 뱀처럼, 욕정에 젖어서, 꿈틀거리지 않았나. 부드럽게 젖은 그 살점은, 분명히,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값진 전리품은, 사람인 성싶었다. 그의 만족은 그처럼 크다. 그녀의 마음을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의 한군데를 내받은 지금에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지라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 것이다." 99-100


목로술집에서 이북 가는 배가 있다는 이야기를 주인으로부터 들은 명준. "그 말에,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진다. 마음이 푹, 놓인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태연하다." 102


"스무 살 고개에 처음 안 여자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도 남았다. 몸의 길은 취하는 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태식이보다는 몇 갑절이나 잘 사랑하겠다고 뻐겼다. 마음은 그랬건만 어떤 열매가 맺혔는지. 적어도 윤애에게 있어서, 그와의 사귐은 무얼 가져다주었을까. 그녀 자신이 사람으로서 여물고 깊어지기 위해서, 어느 만큼이나 도움이 되었을까." 104


"그런데 윤애는 곧잘 그를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는 창피스러웠다. 그녀가 고분고분하면 좋아라 하고, 마다하면 비로소, 그녀도,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고, '사람'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과 부딪친 것을 창피를 당했다고 여겼다니, 남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105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철학은 모든 것이었으나, 철학이라는 이름의 탑에서 사람들을 풍경처럼 내려다보던 와중 윤애가 보였고, 윤애는 그의 탑의 문을 연다. 

"웃으면서 돌아선다. 몇 발자국 떼어놓다가 우뚝 멈춘다. 갑판을 내려다본 채 중얼거린다. 어쨌든 나는 사랑했어. 다시 발걸음을 떼놓아, 이번엔 멈추는 일 없이 곧장 뱃간으로 돌아온다." 107


탓이 자기에게 있다. 홍콩에 상륙하기를 원하는 석방자들. "그러자 엉뚱하게도, 상륙 못 하는 게 자기 탓이기나 한 것 같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명준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는다. 관자놀이가 툭툭 친다." 110

"명준은 점점 불안해진다. 탓이 자기한테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마음이 피둥피둥 커지면서, 그것은 그의 관자놀이에서 따끔따끔한 아픔으로 나타났다. 왜 내 탓이냔 말이야. 왜 내 탓이냔 말이야." 112


"이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래 듣고 있자니, 그 울림은 자꾸 부풀어갔다. 구르는 눈덩이처럼, 가까운 소리를 제 몸에 붙이면서 커간다. 그 커다란 덩어리에 자기 자신을 얹으려 해보았다. 그러나 야릇한 일이었다. 여느 것은 다 거둬 모으면서, 홀로 이명준이란 알맹이만은 자꾸 튕겨버리는 것이었다. 기를 쓰면서 매달렸다.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기 혼자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117


"사람 모양을 한 살을 안았대서 어떻게 될 외로움이 아니다. 스스로 몸을 얽어오던 그리운 사람들의 사무치는 마음이 그리웠다. 마음이 몸이었다. 그는 꿈속의 윤애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윤애, 난 사랑했어. 방법이 아무리 서툴렀을망정. 난 사랑했기 때문에 윤앨 버리고 도망한 거야. 나는 너를 능욕하려 했을망정, 어느 병사처럼 길가의 여자에게 꽃꽃이 익힘을 한 적으 없어.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덮치는 자식들만이 짐승이야. 그들은 아무 핑계도 댈 수 없으니까." 119


깨어난 명준은 선장실로 몰려가 홍콩에 상륙시켜달라고 소동을 일으킨 석방자들이 식당에 감금됐다는 사시을 알고, 화가 난 선장을 만나러 간다. 상황 설명을 해준 한 뱃사람에게 명준, 

""아무튼 미안하오." 

"뭘입쇼. 계속 근무하겠음." 

받들어총을 하는 것이리라. 철컥 쿵 하고 총을 들었다 놓는 소리가 난다." 121


""미스터 리."

무라지가 한 손에 시가를 빼들고 따라온다.

명준은 남은 계단을 마저 밟고 내려, 갑판을 디디고 돌아선다.

계단을 내려오는 무라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무라지는 멈춰서면서 고개를 저었다." 122


명준이 왜 사과를 하는 것인가. 선민의식? 대표자라는 것인가? (너무 예민한가?)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있다는 말은 틀리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는 누군가의 기척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아까 어둠 속에서 그 인물은 말까지 했었다. 명준이 타고르 호를 탔을 때, 그 인물도 같이 탔음이 분명했다. 그 인물이 누군지 알고 싶다." 123


"윤애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욕정한 자리에서 그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 그녀의 가는 팔은 끈질기게 그의 목에서 풀릴 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명준과 그녀의 머리는 모래에 버무려져서, 수세미같이 되게 마련이었다. (...) 그런가 하면 이튿날, 그녀는 죽어라고 버티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의 입술을 물리쳤을 때처럼, 그녀는 한사코 명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두 허벅다리를 굳세게 꼬고, 그 위를 두 팔로 감싸 안은 그녀에게서 명준은 흠칫 물러서면서, 윤애라는 사람 대신에 뜻이 통하지 않는 억센 한 마리 짐승을 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일그러진 입술과, 그의 팔에 박혀오는 손톱의 아픔을 떠올리며, 사람 하나를 차지했다는 믿음 속에 취한 하룻밤을 지낸 다음, 그 마찬가지 자리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뚜렷한 버팀은, 그를 구렁 속으로 거꾸로 처넣었다. (...) 50킬로 남짓한 그녀 자신의 뼈와 살로 이루어진,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이었다. 그것은 여자란 이름의 사람이 아니었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짐승이었다.

"윤애, 윤앤 그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다 거짓말이야? 사람이, 다른 한 마리의 사람을 사랑하는 데 무슨 체면이 필요해? 그게 저 많은 사람들이 걸려서 넘어진 돌부리였어,. 그 어리석고 치사한 자존심 때문에 행복을 죽여버린 거야. 이러지 말아줘. 난 윤애가 불탈 때만 행복할 수 있어. 윤애 가슴에 있는 그 벽을 허물어버려. 그 터부의 벽을. 그 벽을 뛰어넘는 남녀만이 참다운 인간의 뜰을 거닐 수 있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야. 여자는 파산했을 때를 예비해서 잔돈푼을 몰래 저금하는 거야. 그따위 부스럭지 돈이 미래를 보장할 것 같애? 버려, 버리고 알몸으로 날 믿어줘. 윤애가 날 믿으면 나는 변신할 수 있어. 무슨 일이든 하겠어. 날 구해줘."" 125-6


124-7 다시 한 번 읽을 것.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헤서. 이름에 대해서. 


"잡은 고기를 넣어두는 자리였던 모양으로, 비린내가 메스꺼운 갑판 밑 어두운 뱃간에서, 그는 때 묻지 않은 새로운 광장으로 가는 것이라고 들떴다. 그런 서슬에도 잠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광장에는 맑은 분수가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꽃밭에는 싱싱한 꽃이 꿀벌들 잉잉거리는 속에서 웃고 있었다. 페이브먼트는 깨끗하고 단단했다. 여기저기 동상이 서 있었다.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처녀가 분수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돌아보는 얼굴을 보니 그녀는 그의 애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잊은 걸 깨닫고 당황해할 때 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름 같은 게 대순가요?"

 참 이름이 무슨 쓸데람. 확실한 건, 그녀가 내 애인이라는 것뿐." 127   -개개인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은, 북한사회


아니,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고, 이명준이 그리는 광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밀실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밀실이 될 수 없으므로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이 불가능하다.


133-4 북조선에 대한 회의감을 아버지에게 토로하는 명준, 그러나 아버지는 말이 없다. 그저 그날 밤늦게 그의 이불을 여며주는 것으로 말을 대신한다.


"몸의 움직임만이 있는 곳에 가서 한번 다짐하고 싶었다. 신문 활자를 세고 앉은 사무실에서 안간힘을 한 게 잘못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 136

몸에 대한 이야기, 몸이라는 단어.


"바로 누우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둥근 얼굴. 기름한 눈매가 똑똑히 보였다. 배우? 가수? 혹은. 사무치는 무엇이 싸 가슴을 죄었다. 고독하니깐, 고독하니깐 나는 벌판에서 떨어지고, 여기 누워 있고, 생뚱한 사람더러 사진을 찍자고 한 거야." 139

병원에 위문방문을 나온 국립극장 소속 여성들 중 하나였던 은혜.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 북조선 사회에 무겁게 덮인 공기는 바로 이 터부의 구름이 시키는 노릇이었다. 인민이 주인이라고 멍에를 씌우고, 주인이 제 일하는 데 몸을 아끼느냐고 채찍질하면, 팔자가 기박하다 못해 주인까지 돼버린 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걸음을 떼어놓는다. '일등을 해도 상품은 없다'는 데야 누가 뛰려고 할까?" 142 주체되기의 불가능성.


자아비판. 143.

자아비판을 할 때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데, 그 자기 자신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줘야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답은 정해져 있고, 주체의 모습 역시 정해져 있다.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습을 뒤집어써야만 한다. 결국, 주체가 될 수 없다.

"명준은, 대들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죽였다. 그를 향하고 있는 네 개의 얼굴. 그것은 네 개의 증오였다. 잘잘못 간에 한번 윗사람이 말을 냈으면, 무릎 꿇고 머리 숙이기를 윽박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짜증 끝에 성낸, 미움에 일그러진 사디스트의 얼굴이었다. 명준은 문득 제가 가져야 할 몸가짐을 알았다. 빌자, 덮어놓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의 생각은 옳았다. 모임은 거기서 10분 만에 끝났다. 명준은 사무친 낯빛을 하고, 장황한 인용을 해가며, 허물을 씻고 당과 정부가 바라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지친 안도감과 승리의 빛으로 바뀌어가는 네 사람 선배 당원의 낯빛이 나타내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명준은, 어떤 그럴 수 없이 값진 '요령'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146-7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엎드려서 울고 싶었으나, 울기 위해서는 그는 네 개의 벽이 아직도 성한 그의 방으로 가야 했다. 아니 그의 마음의 방이 아니다. 마음의 방은 벌써 무너진 지 오랬으므로. 그의 둥글게 안으로 굽힌 두 팔 넓이의 광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혼자서 운다는 일은 강한 사람만이 할수 있는 의젓한 몸가짐이었다.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사람은 우상 앞에서만 운다. 멍석 없이는 못 하는 지랄도 있던 것이다. 이제 명준에게 남은 우상은, 부드러운 가슴과 젖은 입술을 가진 인간의 마지막 우상이었다. 오늘 일로 하여 그는 절박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147

결국, 광장과 밀실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내가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란 광장에서 두 팔로 감싸 안은 부분만큼의 공간이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맵시 있게 살이 붙은 두 다리는, 문득 생생했다. 명준은 가슴이 꽉 막혔다. 보고 있으면 볼수록, 그 기름한 살빛 물체는 나서 처음 보는 듯이 새로웠다. 곤색 스커트 무르팍에서부터 내민 다리는, 뚝 끊어져서 조용히 놓인 토르소였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명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팔 수만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벽은 더듬는 듯이 느꼈다. 그는 손을 뻗쳐 다리를 만져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진리다. 이 매끄러운 닿음새. 따뜻함. 사랑스러운 튕김. 이것을 아니랄 수 있나. 모든 광장이 빈 터로 돌아가도 이 벽만은 남는다. 이 벽에 기대어 사람은, 사로운 해가 솟는 아침까지 풋잠을 살 수 있다. 이 살아 있는 두 개의 기둥." 149


신체 묘사..


""은혜."

"네"

고즈넉이 네 하는 이 짐승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밖에서 졌기 때문에, 은혜에게 이처럼 매달리는 걸까. 이긴 시간에도 남자가 이토록 사무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없을 테지. 졌을 때만 돌아와서 기대는 곳. 기대서 우는 곳, 철학을 믿었을 때, 그녀들에게 등한했었다. 사회 개조의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보람을 걸어보려던 월북 직후의 나날, 윤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무엇이 남았나? 나에게 남은 진리는 은혜의 몸뚱어리뿐. 길은 가까운 데 있다?" 149-50

"남자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진리는, 한 여자의 몸뚱어리가 차지하는 부피쯤에 있는 것인가. 모든 우상은 보이지 않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태어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나도 믿지 못해." 150

모스크바에 가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아 내고 울고 있는 은혜를 안아 주는 명준.

"그렇지. 그녀의 다리가 내게 준 놀라움을 은혜는 모를 거다. 언젠가, 그녀에게 지지 않을 만큼 갚으면 되지 않나. 갚겠다. 갚을 수 있다. 불을 껐다." 160

낙동강 전선에서 다시 만난 은혜, 그녀의 사죄와 뉘우침. 굴 속에서의 섹스.

"눈을 뜨고 은혜를 들여다본다. 그녀도 눈을 뜨고 남자의 눈길을 맞는다. 서로, 부모미생이전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기의 반쪽이라는 걸 분명히 몸으로 안다. 자기 몸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울 리 없다. 그는 팔을 둘러 그녀의 허리를 죄었다. 뉘우치지 안흔다. 내가 잘나지 못한 줄은 벌써 배웠다. 그런 어마어마한 이름일랑 비켜가겠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이 햇빛. 저 여름 풀. 뜨거운 땅.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이 굳세게 꼬인, 원시의 작은 광장에, 여름 한낮의 햇빛이 숨 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바람은 없다." 174 


192부터 묘사되는 이명준의 중립국에서의 삶을 상상하는 내용, ""리 아저씬 중국 분이시죠?" 그러면 고참 언니의 한 사람은, 가벼운 경멸을 섞으면서 신입생의 무지를 고친다. "얘두, 코리안이란다." 나는 내내 웃음을 띤 채 말이 없다. 밤중에 돌아보다가 숙직 간호원이 끄기를 잊어버린 가스 화덕을 발견하여, 그 큰 병원을 불에서 구하게 된다. 나는 표창을 받고 사무실로 올려주겠다고 한다. 나는 모자를 집어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말한다. "인제 가봐야겠습니다, 원장 선생님. 자리를 너무 비우면 안 됩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수위실로 걸어간다. 창문에 붙어서서 존경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원장 선생의 눈길을 등에 느끼면서," 193

----주목받고 싶은 명준, 사실 중립국을 골랐지만 경멸 어린 '코리안'이라는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싶은 명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준 것들은 갈매기들이었다. 

"그들은 잠시 쉬려는 듯, 마스트에 매달려 있었다. 저것들 때문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갈갈, 께륵, 께륵. 울음소리는 비웃는 듯 떨어져온다. 그는 목이 아파서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짓을 한 이 불길한 새들. 허공을 한참 쳐다보던 눈이 찬장에 달린 거울에 멎었다. 눈에 살기가 있다. 찬장 문을 연다. 오른편에 사냥총이 세워져 있다. (...)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그 흰 바닷새는 진짜 총구 쪽을 향하여 떨어져올 것이다. 그때 이상한 일이 눈에 띄었다. 그의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는 다른 한 마리의 반쯤한 작은 새였다." 201-2 새들에게 살의를 느끼는 것은 왜인가? 그리고 이윽고 그들을 은혜와 딸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 왜 은혜는 자신이 딸을 낳는다고 너무나 당연한 듯 말했을까. ""나 딸을 낳아요." (...)"딸을 낳을 거예요,. 어머니가 나는 딸이 첫 애기래요."" 202-3

명준이 여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하고 연결지어 봤을 때, 딸이 의미가 있는 걸까.





-------구운몽

관에서 나오는 독고민. 계단을 올라 2층 자기 방문 앞에 다다랐다. 독고민, 홀로 고독한 백성. 마룻바닥의 편지를 보고 황홀해진다. 그가 받은 편지는 그의 첫사랑 여자인 숙으로 짐작됐다. 황해도 태생인 독고민. 홀로 월남. 군부대에서 그림을 그려주게 됐는데 거기 양부인이었던 여자였다. 그녀와 보낸 시간이 그에게는 "누더기옷에 꿰멘 보석"이다. 222

오지 않은 숙. 극장에서 옆 자리에 앉은 여자, 집에 가는 길에 스쳐지나가는 여자가 극장에서 옆 자리에 앉은 여자인 것만 같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따라가니 텅 빈 광장이 나타난다. 


해전이라는 시를 낭독하는 한 사람, 그 앞에서 자신이 간판사일 뿐이라고 민이 말하자 다들 폭소를 터뜨린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길과 눈길이 마치 쇠졸처럼 샅샅이 그의 몸뚱이를 둘러싼 가운데 그는 초롱 속의 새였다. 그는 자꾸 손을 비볐다. 찬 데서 들어온 몸이 뜨거운 불 곁에서 풀리면서 자릿하도록 즐거웠다. 그는 어쩐지 목이 메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아무 말참견도 말고 한 귀퉁이에 서 있게만 해준다면 얼마나 따뜻하게 불을 쬘 수 있을까." 237

그러나 타이밍 재서 도망나오는 민. 도망가는 민을 잡으러 쫓아오는 사람들. 

""선생님."

"너무하십니다."

"선생님을 붙잡아라."

그런 소리를 지르면서 사람들은 뜻밖에 가깝게 다그쳐 쫓아온다. 그는 공포로 헉헉 느끼면서 휑한 거리를 자꾸 달린다. 어느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저만치서 이쪽을 손가락지랗면서 달려온다. 그는 두번째 모퉁이를 돌았다. 민은 약간 속력을 늦췄으나 여전히 뛴다." 238

---한 말씀만 하시죠, 라는 말에는 그에게 말의 무게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도망 나오는 민은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고...그렇게 봐도 되나?


다시 아팦드 계단을 올라오는 독고민. 전날과 같은 실수를 하고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조심조심 손을 놀려서 성냥을 그어댔다. 이 불이 꺼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요전날 밤과 꼭 같아진다. 그는 하들하들 떨면서 불붙는 성냥을 쥐고 초가 놓인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온몸에 쭉 밴 식은땀을 느꼈다. (...) " 239

(독고민은 스물일곱 해를 살았다.)


편지의 본문에 적힌 날짜와 소인의 날짜가 달랐다. 돌아오는 금요일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약속 날짜가 지나서 닿은 편지. 자기가 광고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잠드는 민.

꿈에서, 망망한 강에서 헤엄치는 민. 사지가 떨어져 나간다.

"쫓는 불구자. 쫓기는 조각들. 아수라의 터가 벌어진다. 쫓기고 몰린 조각들은 강물에 뛰어든다." 244

"아까부터 무엇인가 두리번두리번 찾고 있는 괴물이 있다. 벌거벗은 여자였다. 그녀는 몸통과 팔다리는 멀쩡했으나, 머리가 없다. 무엇을 봤는지 그녀는 무릎을 탁 치더니, 기운차게 낚시를 던진다. 덤벙. 추가 떨어지며 낚싯바늘이 물 밑으로 내려온다. 그때야 그 바늘의 과녁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바늘은 그의 입술을 향해 가까워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황급히 팔을 들어 막으려 했다.

팔이 없다." 245

"그는 그만두고 돌아서다가, 머리카락이 곤두서듯 오싹했다. 요먼저, 숙을 만나러 나왔다가 허탕을 치고 거리를 헤매던 날 밤도 꼭 이랬던 것이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거리였다. 그날 밤 그 언저리임이 분명했다." 246


혁명군 방송이 흘러나오고, 다시 자신을 쫓는 어제의 사람들로부터 도망가다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집으로 도망 들어간 민. 안경 쓴 늙은 신사, 두툼한 장부를 들고 서서 민에게,

 "사장님 뭘 하고 계십니까?"(...)"사장님 이러신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250

회사 예산과 돈 얘기를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민에게 결정을 구함.


""...... 자 결심하십시오!"

노인들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여 민에게 재촉의 뜻을 나타내 보였다. 이 방은 무얼로 덥히고 있는 건가? 이 바쁜 때, 민의 머리에 그런 의문이 얼핏 떠오른다. 하긴 눈에 보이는 데는 난로도 없고 스팀 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방 안은 훈훈하고, 민은 손바닥에 배는 땀을 느꼈다. 또다시 쿨럭쿨럭 기침 소리. 민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빌었다.

"여러분.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대답이 없다. 민은 말을 이었다.

"저를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는 문 쪽으로 움직였다. 노인들이 우르르 일어선다.

"사장님."

"고정하십시오."

"진정하셔야 합니다."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불쌍한 늙은 것들을 보시더라도……"

"사장님……"

그들은 민을 빙 둘러싸고, 제각기 민의 팔목, 앞죽지, 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와 마주선 감사역은 안경 너머로 울고 있다. 갑자기, 라디오가 숨 가쁘게 부르짖기 시작한다. 라디오는 보이지 않는다." 253-4

꿈에서 강에서 사지가 떨어져나가는 것과 묘하게 닮아 있다.

새로운 장소, 스무 명의 여자들이 춤을 연습하는 곳. 거기서 선생님인 민. 

"이 사람들이 아무 말도 걸지 않고 저렇게 춤만 춰줬으면. 그리고 나한테는 아무 말도 걸지 말아주었으면. 그리고 여기서 불을 쬐면서 앉아 있게만 해준다면, 그는 도망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독고민은 춥지 않았다. 땀도 걷혔다. 따뜻하고 행복했다. 그녀들은 마치 독고민을 잊어버린 듯 부지런히 추고 있었다. 

미라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행복했다. 이 사람들이 그에게 말만 걸지 않는다면 그는 이제 이 여자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267

"아차, 그것이 아니었구나. 민은 무안했다. 자기는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차츰 깨닫는다. 그녀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누군지 모릅니까? 접니다. 독고민입니다. 숙이 애인입니다." 268

다른 사람들도 민을 모르고, 민도 민을 모른다. 숙이 애인이라고 타자에 의해 정의내려지는 자신의 정체성은 사실 숙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부정당한다.

"민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다만,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서 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뽀득뽀득 이를 갈면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소름이 끼치는 소리. 달아나야 한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이 무서운 늙은 여자한테서 벗어나야 한다." 274

자꾸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민.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면 이것도 저것도 죄다 자기에게 어울리지는 않거든.


"그래서 우리는 선생님에게 묻기로 했어요. 선생님도 우리를 천한 계집들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선생님 말씀을 듣고 행동하기로 했어요. 선생님 대답해주세요. 대답하시는 게 선생님 의무예요. 왜 잠자코 계세요? 우린…… 선생님을 사랑해요. 선생님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 왜 지켜만 보세요?"276-7


"바람 속을 사람들은 달려간다. 달려라. 달리면 구월될 것이다." 283


투시하려 한 죄, 결론을 내려고 한 죄, 잊어버리지 않는 죄. 이 죄에 와서 보니까 이 모든 수인들이 독고민의 다른 모습인 것 같다. 


방송과 소리의 상징을 살펴봐도 흥미롭겠다. 이것들은 시각적 실체를 지니지 않은 것들이다. 

소장이 직접 안내를 해주기 시작. 오늘날의 죄는 '심리적인 조화를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각하, 한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는 정계에서도 진보적인 분으로 알려진 분이니, 믿고 말씀드립니다. 큰일을 꾸며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마지막 정치 형태는 철학자에 의한 다스림이라고 까놓았습니다. 철학자를 정신의로 풀이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각하. 민중은 폭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심해주십시오."

독고민은 소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295 

또 결정권자의 위치에 놓여 곤란하게 된 민. 그런데 한 통의 공문을 전달받는 소장, 독고민을 '풍문인'의 죄명으로 체포하라는 내용이었음. "그는 인생을 살지 않았으며 마치 풍문 듣듯 산 것임." 295


313-4 독고민의 처형 장면. 독고민은 계속 풍문인으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타자들이 자신에게 씌운 프레임을 거두지도, 수용하지도 못한 채로 정체성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 그가 광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서로의 프레임 작업의 최종 결과가 광장에서의 처형이며, 이


우리는 구운몽을 읽으며, 독고민이 종체 누군지 알 수 없다. 옛날에 그림을 그린 간판화가이며 숙이라는 왼뺨에 점을 가진 여자를 자신의 애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처음 시를 읽던 빨간 넥타이는 독고민을 '수령'이라 부르며 봉기가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버림받지 않을 새 깃발, 새 보람, 새 원리, 새 강령을 달라고 한다.


"민은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야릇한 헛갈림에 빠져들고 있다. 나는 정말 이 사람들의 수령이 아닐까.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 홀리면 안 된다. 그러면 다시는 숙을 못 만난다. 하지만 숙은, 아까 광장에서 내가 총 맞아 죽을 때도 건져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생각을 하자 왈칵 서러워진다.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아까 노인도 자꾸 사랑하라고 했다. 필시 그녀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으리라. 아니 사정이 없대도 좋다. 그녀가 몰라도 좋다. 독고민은,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어금니를 굳게 물며 입술을 떨었다. 이 사람들에게 홀리면 안 된다. 어떤 유혹이 와도 물리치리라. 집착할 아무 까닭도 없어진 사람이, 집착할 아무 까닭도 없어진 사람에게 매달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바보는 끝까지 바보였다." 328-9

독고민이 숙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가 그나마 그의 정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과 이어져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동물의 우화에서 왼쪽 뺨에 점이 있는 관세음보살은 숙과 민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박사, 붉은 넥타이의 조수, 민 선생(해전이라는 시를 쓴 시인), 눈이 움푹 들어간 간호부장(댄서),  견습 간호부(왼쪽 뺨의 점)..


간호부장은 동사한 독고민의 시체를 보며 4월에 죽은 자기 아들을 떠올린다. 4월..

"곧 4월이 온다. 그 4월을 어떻게 참을까. 그 4월이 무엇 하러 또 오느냐." 342


키메라. 정체가 무엇인가.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난처한 것은, 전혀 성질이 다른 조각으로 이루어진 일기의 인물 화석입니다. 즉, 머리는 신부. 얼굴은 배우. 가슴은 시인. 손은 기술자. 배는 자본가. 성기는 말의 그것. 발은 캥거루의 족부. 이 화석의 눈알이 무언지 아십니까? 웃지 마십시오. 아니, 웃으십시오. 눈알이 있을 자리에는 현미경 렌즈가 박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나 희극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이지러지고, 우습게 겹치고, 거꾸로 붙은 화석은, 고난에 찬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서글픈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조성들의 역사는, 생남 기념으로 아버지가 심어준 나무가 아름드리 노목으로 자란 뿌리 가에, 그 아들의 늙은 뼈가 묻히는 식의 역사도 아니었고, 한 도시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하여 작전을 바꿨던 어떤 지역의 그것처럼, 복 받은 역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346


사랑이 언급되는 것은 암호로서ㅡ 피닉스가 다시 날 수 있을까요ㅡ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350쪽에서,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랑했을까? 라는 여자의 질문에 민이라고 불린 빨간 넥타이가 ""깡통. 말이라고 해? 끔찍한 소릴? 부지런히 사랑했을 거야. 미치도록. 그밖에 뭘 할 수 있었겠어."" 350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밀실에서나 가능한 그런 사랑이고, 그밖에 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사랑에 집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일반적인 애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도피처로서 기능하는, 어딘가 어긋나고 기형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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