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 1

나(철이), 누이동생 옥이, 아버지(55). 옥이(19)는 성악을 하다 관뒀다. 

크리스마스이브이고, 옥이는 외박을 허락받고자 하며 아버지는 '아무튼 외박은 안 된다'고 말한다.

""크리스마스면 예수가 난 날이라지. 예수교인이면 밤새 기도두 드리고 좀 즐겁게 오락도 섞어서 이 밤을 보내도 되련만 온 장안이 아니, 온 나라가 큰일이나 난 것처럼 야단이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니?"" 15

24, 사랑에 대해 언급하는 아버지. ""사랑이란 물건은 아껴야 된다는 거야. 말하자면 귀금속을 가진 사람들이 진짜는 은행에 맡기고 가짜를 지니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사랑을 남용하면 망가지기 쉬워. 샘솟듯 하는 사랑이란 말이 있지만 다 하는 소리구 사실은 그렇지 못해. 사랑은 거미줄 다루듯 해야 돼."" 24-5

시간을 벌어 옥이를 못 나가게 할는 아버지. "나는 그제사 아버님의 음모를 알아차렸다. 그는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음모에 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나는 아직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어른이 한 아이를 속이고 있다는 것만을 다진다면, 이것은 무서운 도덕적 부패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었으나, 그렇게 겉만 보고 일을 가름하는 것은 또 의심할 수 없이 얄팍한 일이었다." 25

어머니까지 불러서 화투를 치기 시작한 가족. 결국 크리스마스 이브를 넘기면서 화투를 친다. 옥이는 나가지 못한다.


크리스마스 캐럴 2

다시 크리스마스이브가 돌아왔다.

"아버님은 옆에 놓였던 총채를 들어 달력을 가리키셨다. 총채의 끝이 가리키는 곳ㅡ25." 33

""말꼬리를 잡고 그러지 말아라. 아니 너는 어떻게 된 아이가 무슨 의논을 하면 요긴한 점에는 글쎄올시다만 하구, 그리 분명치가 못하냐?"

"아버님, 오늘 저녁 어머니하구 옥이가 교회에 나가면 정말 안 될까요?"

"안 된다."

"다시 생각을......"

"너두 사람이면 창피한 줄 알아라."

"글쎄올시다."" 37

대학 1학년이 된 옥이. 작년에 만나던 쟈니와는 헤어진 것 같다. 


3

자신을 감찰관으로 오인한 순경에게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치며 도망치는 나.


4

유럽에 있는 그. 서양사를 공부하고 있다. 성경책을 고양이같이 끼고 있는 성녀, 이웃 H. 

"그 거대한 손때 묻은 시간의 쌓임이 그에게는 부러운 것이었다. 반역하기 위해서도 먼저 그것들이 있어야 했다. 그는 늙은 선장의 수집품 중에서 중세 해적이 쓰던 것이라는 해골이 그려진 해도를 보았을 때도 그런 것을 느꼈다. 해골의 표. 그것을 유럽인은 피부로 이해한다. 이 사회에는 모두가 피부로 이해되는 것뿐이다. 그런 상징 속에서 산다. 그런 상징들은 그들의 신경이며 세포며 눈알이며 손톱 새에 낀 때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그것들은 학문이며 논리이며 교양이며 요컨대 관념이다. 이 틈새. 그것을 메우는 것. (...) 인간은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 인텔리의 천박성만이 꿈꾸는 관념이다. 역사의 산물인 인간은 역사의 때에 절어 있으며…… 그 역사를 같이하지 않은 인간들과는 다른 영혼의 성감대를 가진다, 라고 조금 아까까지 그는 믿고 있었다. 그런데……" 115-6


들어오는 누이동생. 다시 현실의 장면인가봄. (유럽에 있는 장면은 과거 회상?) 

알고보니 그 노파가 안고 있던 성경책의 가죽은 자신의 애인의 가죽이라고 함. 임종의 자리에 고백하며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했다고 한다.

"그보다도 자네는 늘 그 노파를 유럽인의, 그러니까 기독교의 상징처럼 말하곤 했는데 그녀의 일생에 걱친 그 집요한 행위는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었단 말일세.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동기에서 나오고 그것으로 지탱된 것이었어.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 그것은 이 지구 상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아닌가. 아무튼 나는 이 사건이 자네의 연구에 좋은 데이터가 되기를 희망하네." 119


-그러나 그녀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독신瀆神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법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수를 하지 않는다. 그녀는 했다."119 


"약속? 오늘 밤에는 모두들 약속이 있어서 저렇게 파티가 있겠구나. 크리스마스 파티. 크리스마스를 파티에. 하느님을 구실로 암숫이 재미 보기. 바이블을 구실로 수컷의 가죽을 지킨 여자. 그렇다면, 가만있자. 저 애들은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아니. 안 그렇다. 그 늙은 여자는 죽음의 자리에서 계약을 새롭힐 상대가 있었다. 바이블은 하느님에게 돌린 것이다. 바이블─고양이─수컷의 가죽─다시 바이블. 이라는 재주넘기. 그런데 저 애들은? 그들에게는 계약을 새롭힐 상대가 없다. 상대가. (...) 저 늙은 외국인 여자가 가지고 있던 두 가지가 나에게는 다 없다. 바이블도, 한 장의 가죽도. 그리고 저 애들의 팻 분도. 나에게는 약속도 없다. 당장에는.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도 아니다." 120-121 본질적인 것의 무게는 전혀 없이 외피만 모방하고 있는 여기 이곳의 모습.


"크리스마스가 페스트처럼 난만하게 번지고 있는 이 서울의 밤이 샐 때까지." 121



5

1959년 여름 어느 날 밤. 오른쪽 겨드랑이에 가래톳이 났다. 방에 들어가면 겨드랑이가 톡톡 아파오고, 뜰에 나가면 아픔이 가라앉는다. 방에 들어가자니 겨드랑이가 너무 아파 계속 나가 있음. 아버지와의 대화, 아버지 방에 들어가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방에 들어가면 아프다. "나는 제 집이면서 꼭 도적놈처럼 뜰의 어느 구석에 숨어서 밤을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활이 두 달째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견디다 못해서 담을 넘어서 밖으로 나가보았따. 그랬더니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었다. 뜰에 나와 있어도 가끔 뜨끔거리고 손을 대보면 미열이 있던 것이 거리를 거닐게 되면서는 아주 깨끗이 편한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독자들은 곧 짐작이 갔겠지만, 문제가 생겼다. 내가 의료적인 이유로 산책을 강요당하게 되는 시간이 행정상의 통행 제한의 시간과 우연하게도 겹치는 점이었다. 고민했다. 나는 부르주아의 썩은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관청에서 정하는 규칙은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12시부터 4시까지는 모든 시민은 밖에 나다니지 말기로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규칙이니까 페어플레이를 지키는 사람이면 이것은 소형의 도덕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도덕률을 지키는 한 내 겨드랑은 요절이 나고 나는 죽을는지도 모른다. 바이블을 읽기 위해서 촛불을 훔쳐도 좋은가. 이것이 숱한 사람들이 걸려서 코를 다치고 정강이를 벗긴 돌부리라는 걸 알고 있다. 시름에 잠긴 나는 괴로웠다." 152-3


"오늘은 경관을 만났다. 나는 얼른 몸을 숨겼다. 그는 부산하게 내 앞을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레닌인 것을, 안중근인 것을, 김구인 것을, 아무튼 그런 인물임을 실감한 것이다. 그가 지나간 다음에도 나는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공화국의 시민이 어찌하여 그런 엄청난 변모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정치적으로 백치나 다름없는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위에서 레닌과 김구를 같은 유에 놓은 것만 가지고도 알 만할 것이다. 그런데 경관이 지나가는 순간에 내가 혁명가였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혁명가라고 자꾸 하는 것이 안 좋으면 간첩이래도 좋다. 나는 그 순간 분명히 간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간첩이 아닌 것은 역시 분명하였다. 도적놈이래도 그렇다. 나는 분명히 도적놈이었으나 분명히 도적놈은 아니었다. 나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혁명가, 간첩, 도적놈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알 만해지는 듯싶었따. 이 맛을 못 잊는 것이구나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161


겨드랑이서 까마귀처럼 까만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밤산책을 나가 어떤 집 잔디를 구경하다 그 집 주인에게 걸려 집 안으로 잡혀들어갔다. 그 외국인 집주인과의 대화. "서구의 정신사적 분열이 자기 집안일인 것처럼 심각해하는 원주민 인텔리를 보면 구역질이 나요. 구역질. 요 노랑 원숭이 새끼 같으니라고. 그냥, 칵…… 아주 짜증이 난다 말씀예요. (...) 요 먼저 어느 신문의 수필란에 보니깐 한국 사람은 스마일을 모른다, 서양 사람들의 스마일, 그것이 우리에게도 몸에 밸 때는 언제일까라고 쓴 사람이 있더군요. 난 그걸 보고 X이나 X아라 하고 외쳤답니다. 서양 물 먹은 사람들이 순진한 동포들을 스포일하고 있어요. 원주민 인텔리란 건 우리 눈에는 양식 호텔의 보이와 다를 것 없어요. 우리들의 매너를 알고 있으니까 편리하다는 것뿐이죠. 가방 맡기고 코트 맡기고 사창가나 안내시키는 거죠. 에익, 퉤." 167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인류에게 끼친 무한한 해독, 그건 금덩어리를 실어갔다든가, 상품을 팔아먹었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난 생각합니다. 원주민들의 영혼을 골탕 먹인 것, 경험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처럼 위장한 것. 이겁니다. (...) 외국에 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굉장하더군요. 그쪽은 이런데, 우리가 글렀다. 그쪽은 저런데, 우리는 말씀 아니다. 저쪽은……꼭 환장한 것 같아요. 온, 정신 있는 사람들입니까? 정신은 있어요. 양심과 용기가 없어요. 당신네 말대로 하면 멋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저 대리점 노릇으로 마칩니다." 168


4.19. 광장의 피투성이 학생들과, 한쪽 눈에 쇠붙이가 박힌 시체. 피에타. 5.16이 일어나고, 여전히 나는 날개 때문에, 혹은 취미로 밤에 산책을 나선다. 

같은 군중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쏟아져나온 사람들에게는 통증을 느끼는 날개.


1961년, "왜 오늘 밤 하필이면 날개는 발작을 일으키는가? 혹은, 왜 하필 오늘 밤  통행 제한을 철폐하는가?" 181-2


하렘의 쾌락. 도시를 산책하는 것, 그 도시의 모든 것들(나의 여자들)을 만나는 것. "그러고 보면 나는 날개를 닮아가는 것이다. 날개는 내 마음이다. 그런데 나는 그를 알 수도 없고 항차 그를 다룰 수도 없다니. (...)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모른다. 아무튼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또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렘의 여자들은 이 괴로움을 내게서 덜어줄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노예들인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받고 또 그만큼 한 사랑을 돌려주지만 그저 그뿐이다. 나의 이 고통을 가셔줄 힘까지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끝까지 내 문제다. 나만의 문제다. 나는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다 날개가, 산책 도중에 만난 사람의 모두를 마다하지는 않았다는 일이다. 날개는 사람을 가렸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184


크리스마스에 길거리에 쏟아진 사람들은 모두 고통으로 대했던 날개, 4.19의 군중이나 등등..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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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고


민.  전차에서 본 어떤 여자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기시감에 사로잡혀 생각에 빠진다. 몇 해 전 군에서 나와 어느 여인과 파티를 간 기억, 189~, 여성에 대한 이미지. 같이 왈츠를 추다가 행군 중인 장면으로 넘어간다. 추운 날, 행군하며 웃고 있는 M소위. M소위의 애인은 설아라는 펜네임으로 시를 쓰던 여자였고, 가슴에 까만 기미가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지금 보니 가슴에 까만 기미. M소위의 그 애인이었다. 그는 여자를 데리고 나와 헤어졌다. 이후 연락 두절. 


"거울 속에는 쫓기는 사람의 초조함을 숨기느라고 짐짓 평정을 꾸민 가짜 성자의 탈이 있었다. (...) 저 탈을 피가 흐르도록 잡아 벗겼으면. 그 뒤에는 깨끗하고 탄력 있는 살갗으로 싸인 얼굴이 분명 감춰진 것을 알고 있다. 그 탈을 떼내는 일에서 어딘가 민은 미지근하게 해왔음이 사실이었다. 용서 사정 없이 그 거짓의 얼굴 가죽을 벗겨 내는 작업에 정실이 섞였다면 그것은 또 어찌 생각하면 그 탈이 벗겨진 다음의 맨얼굴을 은근히 두려워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205


무용론을 잡지에 실었다가 재작년 '현대발레단'으로부터 안무가로 일해달라고 입단 교섭을 받았다. 연출자이자 주역 무용수인 강 선생, 그의 누이동생 정임이. 명애. 


The Psychic Society(심령학회?) 란 간판을 발견함.


미라. 민과 함께 살았던 여자. 서너 달 살다 갈라짐. 올해 국전에서 입선하려는 미술가.

어느 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H선생, 손위 친구. 


심령학회 근처를 지나다 들르게 됨. psycho--humanism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게 됨.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의 정신적 분열은, 세계관의 상실에 유래하는 윤리 감정의 결핍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는 새로운 세계관을 준다는 방법으로써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역사가 밝혔듯이 세계관이란 바뀌는 것이며, 인간은 변하는 것 위에서 마음 놓을 수 없기 때문에." 217


"그렇다. 제군이 즐기는 말을 빌린다면 동양의 방법은 민주주의적이 아닌 것이다. 동양은 영원히 민주주의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방법은 그와는 다르다. (...) 민은 동양인의 두 배는 보통 되는 저 부하니 털이 있는 두툼한 손, 기름진 반들거리는 서양인의 육감적인 손이 자기의 목구멍에 밀려드는 환상을 보며 울컥 메스꺼워지는 것이었다. 로맨티시즘의 최후의 거점, 달로 인간의 비행기를 띄워 보낸 저 서양인의 '기름진 손'을. 그렇다. 동양에 없는 것은 이 '기름진 손'이다." 218-9


가바나 국의 왕자인 다문고.

궁녀 아라녀. 

브라마의 얼굴을 가지고 싶은 왕자 다문고는 자신의 참다운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얼굴을 덮고 있는 탈을 벗고자 한다. 

"그러나 내 얼굴에 씌워진 탈을 벗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탈은 뒤로 물러나 여전히 도사리는 것이었으며, 그 탈을 한 번 더 벗기면 또 뒤로 물러난다. 마치 그림자를 밟을 때와 같은 술래잡기─끝없는 술래잡기다." 228


본인도 기억 못 하는 꿈을 누가 꾸는 것인지 묻는 민. 코밑수업의 대답. ""다만 가설을 말씀드리는 것이 용서된다면 아마 어느 근원적인 '나' 혹은 '우리'가 꾸는 것이겠지요. 개개의 '나'나, 추상적인 '우리' 이전의 말씀이에요."" 232


한참을 헤매다 다시 심령학회로 온 민. 또 꿈을 꾼다. 부다가라는 마술사를 불러들여 바라문의 얼굴을 갖는 법, 지금 쓰고 있는 탈을 벗는 법을 묻는다. 가장 낮은 이의 낯가죽을 써야 한다는 처방, "나는 히말라야의 깊은 오막살이 속에서, 때를 모르는 나무꾼의 삶을 좇고 있었다. 아득히 불어가는 눈바람 소리. 유리처럼 푸른 하늘. 천천히 타오르는 노변의 붉은빛." 264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이 되어 무심히 부다가를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지금까지의 기분을 대번에 깨뜨려버리는 광경을 보았다. 부다가는 아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은 듯했다. 그 눈빛은 복종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늘 보던 그것이 아니고, 어떤 동정의 눈매였다. 나는 가라앉으려 하던 무엇이 딱 움직임을 멈추며 또다시 솟구쳐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272


옆의 점임.

"민은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 뒤로 물러서면서 그녀의 온몸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싱싱한 사슴이다." 274

"이런 발레리나를 민은 처음 보았다. 몸 크기의 잘된 인형을 보는 느낌이었다. (...) 내가 시킬 탓으로 움직일 인형…… 그는 자기 방 시렁 위에 얹힌 인형들을 얼핏 떠올렸다.

그러나 얼마나 잘 만든 인형인가? 말도 하고 웃기도 하고……" 276


280쪽의, 밤새워 그려놓은 출품작을 칼로 찢어버리는 사랑, 인형의 팔을 분지르고 힘을 줘 비틀어서 표현하는 사랑??


""정임이, 나면서부터 선인은 애쓴 끝의 성자보다 복된 거야. 힘쓰지 않고 착하다면 군소리가 무슨 소용이야?"

이것은 정말이다. 너는 이 말이 얼마나 정말 정말인지 모를 거야. 모르는 게 너의 매력이고 모르는 게 단 한 가지 흠이지만.

"사실은 저를 깔보시는 거 아니야요?"

쳇. 언제 그런 말을 배웠소. 그런 말을 배우면 못써요. 그런 투를 배우기 시작하면 너는 마력을 잃은 불쌍한 마녀처럼 동리 사람들에게 학살당하는 거야. 자의식이라는 동리 사람에게 때려잡히는 거야." 282


여성을 바라보는 주인공들. 여성들은 모르고 있어야 한다. 


"네 눈이 빛나누나. 그렇다. 나는 정임이를 적어도 공연 날 밤까지는 사랑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이미지를 허물지 않기 위하여. 미라에게 죄 될 것은 조금도 없다. 정임이 같은 애숭이를 미라와 바꿀까 보냐. 내 여자는 미라다. 미라를 잘 길들이는 길만이 뜻이 있다. 문제를 가지지 않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고 회피다." 282

-미라는 단 한 번도 그가 자신의 아틀리에에 찾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거기에 있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았을 뿐이다. 민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길들이기'를 욕망한다.


"미라는 그가 찾아가면 덤덤히 앉은 채 전혀 상대를 하지 않았다. 오면 오는가, 가면 가는가, 바람보다 더는 그를 여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국전 개전이 가까워오면서 더 심해지는 듯했다.

일부러 민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면 그녀의 수법은 큰 성공이었다.

몸과 마음이 안고 뒹굴던 여자의 그런 덤덤한 반응은, 민을 무섭게 만들었따. 버림받는 것. 인간이 싫어졌다고 쓴웃음으로 버림받는 것은 지옥이었다. 하느님은 몰라도 좋지만 너만은 알아달라고 염치를 버리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런 곧은길로 나가지는 않았다. 민은 아직도 어느 날 새벽 자기의 앙상한 발목을 그리고 앉았던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에 막혀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승부에서 써먹을 패 쪽지로서 쓰기 위하여 짐짓 막힌 체하는지도 모른다." 284-5


286쪽부터 나오는 민의 일기장 메모를 다시 한 번 볼것!

"서양은 늘 그 변두리에 풀이 못 할 어떤 것을 남긴다. 이 어떤 것이 동양의 재산이다. 서양이라는 등기소는 이 재산의 등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근대라는 물권법에는 그런 재산에 대한 항목이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동양은 이 창피한 유산을 이그조티시즘을 거래하는 서양 상인에게 헐값으로 팔아버린다." 


"'파리와 같은 진짜 허무가 없다고 열등감을 느끼는 식민주의자들이 있다. 마치 뉴욕의 갱에 비하면 한국의 깡패는 어린애 장난이야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비관하듯이. 소름 끼치도록 딱한 아저씨들." -최인훈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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