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르디외는 아비투스가 스키마schema 개념과 호환될 수 있다면서, 인간 주체의 세계에대한 행동 또는 실천적 관계맺음을 매개하고 구성하는 '구조화된 성향들의 시스템'을 아비투스라 했다. 아비투스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개인 및 집합적 주체들의 실천들을 매개하고 생산한다. 또 아비투스는 과거 경험의 적극적 현존이며 인간의 지각, 사상, 행동의 스키마와 성향을 생성하고 장시간에 걸쳐 실천을 조정하고 나름의 항상성을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아비투스는 모든 공식적이고 노골적인 규범보다 훨씬 지속적이고 믿음직한 스키마이다. 

주목할 것은 부르디외가 아비투스를 제반 감각들의 그릇인 신체에 각인되고 쓰인, 다시 말해 신체화된 역사embodied-history이며 역사적 과정을 거쳐 장기적으로 구조화된 성향, 즉 역사적 구조물로 간주한 점이다. 아비투스가 신체에 쓰인 과거이자 구조물이라는 말은 과거 전체가 아비투스에 적극적으로 현현해 있다는 것이고 이는 아비투스가 사회구성원들에게 제2의 성징으로 내면화되어 있음을 뜻한다." 17-8

르페브르, 일상생활, "일상은 구조를 재생산하는 영역이 아니라 다면적이고 복잡한 충동이 일어나는 영역이며 이 충동들이 사물과 존재에 영향을 미쳐 역사를 만드는 실천praxis과 생산poiesis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지식을 지배적으로 점유한 (파워)엘리트에 의해 재생산되지만 이것에 변화를 가하는 힘은 인민, 대중, 주체의 일상, 그리고 일상을 조직화하는 정서구조, 아비투스, 감정, 충동들이다. 역사는 이성적으로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질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 충동, 욕망에서 변화의 동력을 얻는가 하면 또 같은 메커니즘으로 반동과 퇴행으로 역행하기도 한다. 감정은 역사에 개입하고 흐름을 바꾸는 힘이고 세력이며 자원인 것이다." 18

식민주의는 어떤 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가한 '폭력의 행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체적, 물리적 폭력과 수반되는 심리적, 정신적, 감정적 모욕이다. 폭력은 모욕감을 일으키며, 동시에 수치심도 일으킨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감정인 모욕감과 수치심은 사회적 감정으로, 어떠한 집단 전체에서 이 감정이 공유될 때 그 사회의 결속력이 강화되기도 한다.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 피지배 계급, 피압박 민족끼리 연합체를 구성하는 일을 예로 들을 수 있다. "한 국제관계 전문가는 21세기의 세계는 문명의 충돌이 아닌 '감정의 충돌'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따면서 아랍과 무슬림이 모욕의 문화culture of humiliation에 갇혀 있고 서구는 공포의 문화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서구를 지배하는 공포감정은 세계의 영토, 안보,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데서 비롯한 공포이며 이슬람권은 서구 기독교문명으로부터 받아 온 수모와 모욕의 역사가 축적되어 온 끝에 가장 급진적인 세력을 중심으로 연대와 통합을 유도하는 동시에 서구를 향한 증오의 감정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각주:1] (...) 이슬람문화와 아랍 민족 전체가 경험한 모욕과 폭력의 유산이 현재의 서구를 향한 증오감정 그리고 급진적 이슬람 근본주의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일리가 있따. 모욕과 수치는 언제나 약자의 몫이고 분노는 소멸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22 

"한국의 공식적인 국치일은 1910년 8월 29일이지만 모욕과 수치는 훨씬 오래전에, 이민족과의 조우가 이뤄진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국치일은 모욕을 당하게 된 원인과 이유를 되새기면서 치욕을 씻을 수 있는 힘을 키울 것을 다짐하는 날이었따. 국치일 제정 의도는 명확했다. "왜적을 축출할 때까지 해마다 적개심을 새롭게 하기 위한 날"로 삼기 위함이었다. 국치를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보복과 설욕을 다짐하고 다 함께 맹세한다는 의미였다." 24

->민족이 아무리 상상된 껍데기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상징계에서 잘 작동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에 크나큰 원동력이 되므로 단순히 허상이라고 일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근대 사회의 유색인종이 서구 문명과 조우했을 때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것은 이성중심주의라는 파농의 지적은 세기말 조선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근대, 유색인종, 비서구는 반이성적이고 불합리하며 지체된 야만으로 분류되었고, 야만은 이성적 문명에 의해 '계몽당하는 모욕', 종교의 개종, 식민지배, 문화의 절멸과 소외, 정체성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무력을 동원한 군사적 위협은 이에 저항하는 투쟁세력을 만들어 냈지만 근대성은 달랐다. 이성이 인간성의 핵심이듯이 근대 또한 한 사회가 도달해야 하는 역사 발전의 최종 단계임을 자각한 때문이었다." 28

->터키의 경우도 적용되겠지. 파묵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서양'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잃어버리는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애정.

"장기간 모욕과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집단적 결속과 연대를 강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와 달리 자신과 타자에 대해 공격적으로 되거나 자포자기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모욕을 조직화하는 체제에 철저히 순응해 버리기도 한다. 또 모욕과 수치는 분노감정과 강하게 결합해 결속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관계를 파탄내고 분열시키기도 한다. 수치감을 극복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면서 남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 자기확신에 집착하기도 한다." 29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핵심 무기는 근대성이었기 때문에 식민시기 근대성을 향한 공격성도 생성되었따. 그러나 근대성은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매를 통해 소유하고 소비하며 흉내 내기만이 허용된 근대성이었다. 근대성은 박래품으로 수입되고 소비되었다. 그리고 민족 모욕과 국치, 폭력의 경험과 트라우마는 민족해방전선에서 투쟁과 저항으로 해소되기보다 근대성의 공격적인 소비와 흉내 내기를 통해 미끄러지고 빠져나갔다." 31

-> 이 근대성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왔는가? 터키(파묵에서 드러나는)는 민족 모욕과 국치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2

조선의 모욕감, '업수이 여김'을 당한 감정은 직접적으로 외세가 조선의 영토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변화를 만들어낸 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터키는 아타튀르크가 직접 나서서 개혁을 시작한다. 또는 그 이전에 실행된 탄지마트 역시 안으로부터의 개혁이었다. 탄지마트가 실패한 원인은 마치 화혼양제나 동체서용과 비슷한 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보지만, 자세한 것은 더 확인해야 한다. 또한 탄지마트와 아타튀르크의 개혁이 어떻게 터키 국민들에게 수용되었는지도 봐야 한다.

스스로 자신들의 것을 포기했던 사람들과, 외세에 의해 굴욕적으로 자신들의 것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의 차이는 그 모든 것이 지나간 이후에 명백해진다. 자신들이 기꺼이 버렸던 자신들의 역사가 소중하면 소중해질수록 그것들을 버려버린 자신들에 대한 분노와 무기력함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반면에 외부의 압박으로 지배를 받으며 '포기'를 강요받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분노를 외부로 돌릴 수 있으며, 스스로의 것을 이미 잃어버렸더라도 그것은 힘 없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분노이지, 그것들을 외면한 분노는 아니다. 이 결의 차이는 중요할까?

"외국의 업수이 여김을 중대 모욕으로 간주하고 분노하는 것이 국민 된 자의 올바른 처신이라고 일관되게 설파한 서재필이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감정정치의 공학을 이해하고 계몽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병신이 아니라면 타인의 모욕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를 통해 분노는 주체적 문명인의 감정이자 문명의 출발점임을 주지시켰다. 혁명과 변혁은 대중의 공분에서 시작되므로 실패를 경험한 소싯적 혁명가가 다시 돌아와 대중에게 분노감정을 계몽한 것은 처음부토 의도한 것이었을 것이다." 41

-> 분노감정이 주체적 감정이고 문명이 되는 시발점이라고 한다? 분노는 모욕과 수치심에서 기인하고...?


"문명화는 이렇게 타자의 '업수이 여김'과 전면적인 자기비판에서 시작되었다. 민족성, 여갸사, 문화규범, 생활방식, 신앙과 지식에 이르는 모든 것이 부정과 지양의 대상이 되었다. 외세의 군사력과 경제력, 과학기술과 지식체계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자기비판을 멈출 수 없는 근거이고 원인이었다." 43

조선에서 민족이나 국민, 국가에 대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전에는 민, 인민, 백성, 나라 등의 어휘가 사용되었으며 '이천만 동포형제'라는 관념이 널리 쓰였다. 



3

"서양사상의 요체는 인간의 의지에 의한 자연정복, 진취적 자아실현, 지식 추구, 이성, 경험주의, 개성주의, 공리주의이고 이것들이 서구의 진보를 이끌었음에 비해 동양 문화는 현대에 맞지 않는 사상이므로 인류 보편의 대세인 서양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동서 문명의 조화 같은 소리는 귀담을 소리가 아니며 한 발 양보해도 아직 그 시기와 지위에 달하지 못했으므로" 하루바삐 서양화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61-2

"조선은 경험도, 역량도, 지식도, 사상도, 희망도 없는 낙오자, 농자, 아자, 맹자라는 것이 1910년대 식자층(대개는 일본 유학생)이 공유한 비판의식이었다. 67 (독립신문 인용)

"천재로 불리며 대접받고 사는 이 청년[이광수]은 '진짜 양인'을 보는 순간 어느새 자기혐오와 부정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서양인의 모든 것이 가치 있는 데 반해 자신은 상업, 정치, 학술, 예술 어느 것에도 지식도 혜안도 없는 초라한 조선인이라는 자괴감에 휩싸여 새 양복과 새 구두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어도 읽을 줄 모르면서 상해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영자신문 The Chinese Press(1911~1949)를 사서 무심한 척 (기사가 아닌) 광고만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영자지를 보란 듯이 주머니 밖으로 반쯤 나오게 찔러 넣고 일어섰다. (...) 22세 청년 이광수는 새 양복과 구두로도 충족되지 않는 식민지민의 열등감을 영자신문을 보는 포즈로 위장하면서 다시 거리로 나선다. 서구, 근대, 문명의 스키마schema를 내면화한 시선으로 자기를 혐오하고 공격하며 부정하다가 이미지의 위장dissimulation을 통해, 타자의 시선에 민감해진, 그리하여 보일 것을 예상하는 피사체의 정체성을 선택한 것이다.

이 고통, 수치심, 분노는 초기에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공격하는 것 외에 다른 출구가 없었다. 비교에 대한 강박, 열등감, 정체성의 위장, 보이고 평가되는 인종과 신분에 대한 집착, 자기부정은 민족적 모욕에 대한 반응 메커니즘이자 자기파괴, 자기를 혐오하고 징벌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히스테리 반응이었다. 하지만 자기를 향한 냉소와 공격은 조만간 자기 동족을 향할 것이었다. (...) 자신의 문명화 수준을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열등한 동족과 '다름'을 확인하기 위해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친일이라는 것과 문명화한다는 것의 구분선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일본은 이미 문명화한 강대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 문명에 매혹되어 길을 잃은 자들에게 전향은 친일이 아니라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69-71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거울을 보는 나와 거울에 비친 나는 전혀 다른 존재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 두 존재는 또 다른 이상적 자아와 비교되고 있다. 그의 정신psyche에는 3개의 자아 이미지가 충돌하고 분열을 일으킨다. 거울을 보는 현재의 (동포에 비해 문명화된) 나는 거울에 비친 원래의 (식민지 조선인인) 나를 부정하고, 경멸하고 공격한다. 그리고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 이상적 자아(문명의 정점에 있는 서구 백인)는 그의 결핍을 일깨우고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욕망을 자극하면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있다. 아니 상처를 받고 있다." 72


외배(이광수), 거울과 마조 안자(1917)

"...한참이나 거울에 비친 내 얼골을 치어다 보다가 '무엇이, 어디가 달라?' 하얏다. 양인의 눌한 머리터럭과 무엇이 달라? 어찌해 양인의 머리터럭에서는 기름이 도는데 내것은 이러케 거츨거츨해? 양인의 가른 머리는 깨끗하고 향내나고 위엄이 잇서보이는데 내 것은 웨 이모양이야...... 나는 다시 아모리 별 즛을 다하야서 머리를 단장하야도 양인의 것만큼 멋이 못들어. (...) 왜 그 (입)으로서 '지구가 둥글디' '생명은 진화한다' '생존경쟁은 생물계의 철칙이니라' 하는 말을 못했으며 왜 그리로서 '해물리트·파우스트·디뷔나, 코메디아'와 와그넬, 베토벤의 입에서 나오던 소리가 못나왓는고 어찌하야 일세를 경성하는 대설교와 만인을 호령하는 사자후가 못나오며......"


-우월한 나, 그럼에도 조선인인 나, 이상적 나(서구 백인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이의 충돌.

(파묵)커다란 대제국의 역사를 지닌 민족에서 태어난 나, 그것이 몰락한 잔재를 보는 나, 서구의 시선을 가진 나.


"자신의 신체 이미지에 갇힌 식민지민의 의식을, 파농은 정신생물학적 혼합주의psychobiological syncretism로 규정했다. 백인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이론적, 실천적 지식체제 안에서 비서구인은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에만 그 체제에 포함될 수 있고 위치를 부여받는다. 비서구인은 자신의 원시성primitivity-흑인의 흑인성negritude-을 파괴하는 것이 '인종 없는 하나의 사회' 안에 변증법적으로 통합되기 위한 준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식민지민의 정신psyche과 정체성이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흑인은 흑인성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인성을, 보편성이 아닌 자신의 특수성(차이)을 찬미해야 한다는 것이 파농의 처방이다." 76-7


"근대와 서구 보편 문명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의 콤플렉스는 자기 파괴적인 부정을 거쳐 보다 앞선 문명을 가진 제국, 정복자에게 무릎 꿇는 중에도 이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식민화 된 주체'의 구성으 초래한다. 보편 문명에 대한 열등감과 자기 문명에 대한 공격적 적대감 사이에서 그의 선택은, 전향은 합리적이다. 적어도 문명의 우월성을 자각한 자에게 자신을 개조하는 전향은 근대적 전환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전향은 완전하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동경하는 문명과 열등한 자기 문명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식민지민이며 자신의 신체 이미지에 갇혀 있다는 사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문명, 두 문화, 두 민족, 두 신체 사이의 경계에 있는 그는 경계인이고 어느 쪽에도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이런한 삶에서 불안정성은 하나의 성격구조로 자리 잡는다." 86



4, 5

4장은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합법적' 폭력. 청결검사를 빌미로 신체에 가해진 모욕과 처벌 등을 다루는 장이며, 5장은 식민지민들이 수용해야만 했던 사회문화적 규범들을 다룬다. 터키의 경우와는 관련이 없어 보여 대강 훑어보고 넘어갔다. (5장의 공진회 대목은 꽤나 흥미롭다. 염상섭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공진회가 전시하고 있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다.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 실력양성주의, 인격주의, 개조주의는 식민지민의 저주받은 죄의식과 공격성의 산물이다. 근대는 적들의 저주받은 문명이므로 공격해야 하지만 동시에 피할 길 없는 모욕과 수치에서 벗어나게 해 줄 근대였다. 근대, 기계, 이성주의, 과학의 저주 때문에 식민지배를 경험한 민족에게 근대의 저주는 되풀이되고 연장된다. 다시 말해 발전, 성공, 경쟁우위, 권력과 위세, 세계의 인정과 평가, 풍요와 강대국을 향한 공격적 욕망이 집합적 성격구조의 한 속성으로 자리 잡는다. 식민지에서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심리적 소외가 경제적 소외보다 더 객관적으로 중요하다고 간파한 파농은 식민지에서 출세한 자들은 식민 본국의 문화를 습득, 체화하여 자기 종족과 차별화하려는 지적 소외도 내면화한다고 했다.

 주인을 흉내 내는 일 외에 별다른 수단을 갖지 못한 그들은 자신의 관점(스키마)과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는 결코 자유인이 아니다. 그는 소외된 자이다." 133-4


이광수의 <천안기>(1926) "요보"라는 호칭, 조선인에 대한 멸칭.

"요보 소리는 두 번 호명한다. 처음은 말 그대로 조선인인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두 번째는 요보 소리를 함께 들었던 다른 사람들(타자)의 시선으로 호명된다. 이 두 번째 호명은 말이 아닌 경멸 또는 연민의 시선으로 부르는 호명이다. 그래서 요보 조선인은 한 번의 발화에 두 번 모욕당한다." 139


"조선인인 자신은 이 사회의 호모 사케르임을 깨닫는 각성의 순간에 직면하는 것이다. 요보는 죽어도, 죽여도 되는 자라는 타자의식이 조선인의 심리와 영혼에 비수처럼 꽂히는 것이다." 140


"조선인이 조선인을 경멸의 시선으로 보면서 '요보'라고 호명할 때 요보 호명은 식민지민의 순응을 이끌어 내는 정신기술psyche technology이 된다. 요보와 '요보 아닌 요보'를 구분하는 의식도 마찬가지로 요보의 호명 효과가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진짜 요보'南太郞, 福太郞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부자 요보들'이며 '요보가 아닌 요보'는 독립투사라고 구분하는 프레임에 이미 요보의 관념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보의식은 더 진전한다. "조선놈들은 안 돼!"라는 한마디를 무심코 내뱉을 때 그의 모국은 조선이 아닌 제국 일본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141

 

 

6_인정認定 투쟁

'독립 역량을 가진 민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조선과는 달리, 터키는 독립해야 할 지배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치열했다. 이 둘을 어떻게 엮지..?

 

 

7장은 연극과 춤, 노래와 같은 '연예'가 어떻게 식민지배를 받는 민족에게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지를, 8장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조선인들과 그들의 생존법 등을 다룬다. 9장은 '의사제국주의'를 다룬다. 식민지민인 조선인이 중국인이나 만주인을 그들과 대등하게 보지 않고 이미 어느 정도 내재화된 '우월한' 일본인의 시선으로 그들을 본다는 내용이다. 평양사건'의 중국인 대학살을 주로 다루고 있다.

 

"1920년대 초반 조선 사회는 동정에 의해 추동되고, 조직되었다. 바꿔 말하면 1920년대 민족주의는 동정-감정에 의해 추동되었고, 연예에 의해 매개되고 실감되었다. 사람들은 공연을 관람하면서 옆과 주변,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운 동족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 표정, 소리, 말도 함께 보고 들었다. 무대와 관객은 구분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라를 잃은 망국민이었고 식민지민이었다. 이 일체감이야말로 식민지민이 향유한 가장 강력한 카타르시스이고 쾌락이었을 것이다." 221

 

"완전히 일본에 복속된 식민지민인 조선인의 중국에 대한 우월감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들이 받는 모욕과 수치를 보상받기 위해 자신보다 열등한 집단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힘의 열세로 인해 식민지배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조선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는 정체성이다. 부서지고 동요하는 정체성을 가진 조선인은 존재적 안정감을 실감하기 위해 비교 열세에 있는 타자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일본에게 만주를 뺏긴 중국인은 조선인이 찾은 비교 가능한 타자였다. (...) 조선인과 중국인의 민족적 갈등은 심화되고 적대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251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도, 자신들에게 거의 복속되어 있던 조선의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자 그들 역시 "일본을 향한 분노와 적대감이 힘없고 만만한 조선인에 대한 폭력과 살상으로 표출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258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중국인을 향한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데, '만보산 사건'을 중국과 중국 관헌, 사람들의 문제로 오보된 것이 '평양사건'으로 연결되어 수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되었다.

"군중은 완전히 잔인한 '쾌감'에 취해 버렸고 3~4명 또는 6~7명씩 패거리를 이룬 장정들이 핏물 떨어지는 곤봉을 든 채 앞에서 선도하고 그 뒤를 200~300명의 무리가 따르면서 피에 굶주린 이리떼처럼 중국인을 찾아 다녔다. (...) 중국인은 결코 반항하지 않았는데 군중은 그들 약자에게 무자비했다. 군중이 살인의 쾌감에 젖었다는 오기영의 표현은 평양 사람들의 광기를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재판에서 피고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다리가 톱으로 잘린 뒤에 돌로 구타당해 죽은 동흠화란 중국인도 반항하지 않았다고 했다. 왜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려는 무자비한 군중 앞에서 아무런 반항도, 구명을 위한 자비도 구하지 않았을까. 목숨을 애걸해도 광기에 휩싸인 조선인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아서 자포자기한 것일까, 아니면 조선에 살면서 알게 된 조선인에 대한 나름의 고정관념 때문이었을까." 266-7

김동인은 <유가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3년 전 조중인사변의 회고>에서 이에 대한 기억을 적고 있다. 참고할 것.

"이들의 통쾌는 분노를 드러냈을 떄, 히스테리칼하게 소리지르며 공분을 터트리거나 압박하는 대상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선혈이 낭자하도록 칼로 찌르고 베고 배를 가르는 폭력, 노예의 반란, 대량 파괴, 피압박민의 발작적인 반항, 자본가·경찰·압박민족·불의한 강자를 향해 약자가 일시에 돌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이다. (...) 식민지민의 무의식은 이렇듯 피가 흐르고 신체가 부서지는 폭력, 공격, 반란, 혁명의 무의식이다. 반드시 한번은 폭력적으로 가해자를 응징하고 부숴 버려야 사라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악몽은 자신을 개돼지로 취급했던 가해자를 무릎 꿇리고 응징하는 폭력으로 해소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지체되는 동안, 자신의 존재감, 정체성을 다시 정립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신경증의 한 가지 증상인 나르시시즘에 의존한다. 성공, 승리, , 권력과 지배자를 욕망하고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우위를 확신할 때, 비록 일시적이지만 존재적 안정감을 회복하는 식민적 주체성colonial subjectivity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폭력적 식민주의와 겹쳐져 있는 근대성, 근대주의, 근대, 물질문명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내린다. 280-1

 

 

10

파농이 '니그로는 비교이다'라는 명제에서 우리는 식민지민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엿볼 수 있다. 식민지 흑인이 내면화하는 백인과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은 자신과 다른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동족들을 비교하면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조선인은 안 돼!라고 말하는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어느 면에서 비교우위를 확인하는 나르시시즘은 식민지민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신경증의 하나로서 나르시시즘은 불안 증상과 마찬가지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가 보유하고 있는 자기보존 본능이기 떄문이다. 프로에트에 의하면 나르시시즘의 임상적 증상은 외부세계에 대한 외면 그리고 과대망상증으로 나타난다. 다른 말로 하면 나르시시즘은 외부 위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또 나르시시즘의 환상은 실제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환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했다." 288

 

"백인을 정점에 둔 인종주의, 서구중심주의, 근대성과 물질문명을 향한 욕망은 그것들에 대한 흉내mimicry를 실행하고 수행하는 식으로 근대성을 성취하려는 욕망으로 표출된다. 흉내 내기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숭배와 자신의 과거와 민족성 전부에 대한 부정이 동시적으로 공진하는 양가성의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모방을 통한 식민지민의 정체성 구성은 틈새, 과잉, 차이, 균열을 남긴다. 그의 흉내는 애초부터 번역 불가능한 것의 흉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체성은 균열을 간직한 채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불확실성은 식민지민의 정체성을 '미완의 가상적인 존재'이자 '부분적 현존재'로 만든다. 흉내 내기는 자신의 흠집을 감추는 '미완의 가상'인 동시에 그가 흉내 내는 것은 전부가 아닌 단편이거나 파편이고 미지의 것일 수밖에 없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정체성 효과는 언제나 결정적으로 분열적이며 나르시시즘과 편집증이 쌍을 이루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293-4

 

갈퉁J.Galtung(1990, cultural violence)은 직접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의 개념을 제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적 폭력이다. "문화적 폭력은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바꾸고 현실을 흐릿하게 만들어서 폭력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최소한 느끼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조적 폭력을 장기화, 정당화, 합리화한다. 착취당하는 하층부의 빈곤, 기아, 질병, 그리고 약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착취구조가 문화적 폭력에 의해 거의 영구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폭력은 대항적 폭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력감, 박탈감과 좌절, 희망 없음의 증상을 초래한다. 이러한 심리적 내상이 결국 자아를 향한 공격성으로, 그리고 외부를 향한 무관심과 포기의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경고했다." 295

 

근대화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어버리는 '레시피'의 부재,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다. "자의식의 토대가 되는 과거의 일체를 부정당하는 곤경 그리고 자신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레시피가 단편적이고 실제에 맞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무력감과 냉소에 빠지고 마는 곤경에 직면한 것이다." 310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감과 무기력함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그 레시피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을 꾸며낸다. "그들은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냉소, 독설, 허세, 멜랑콜리의 언변과 제스처를 과시한다. 그들은 타인에게 보이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주변의 타인들과 거리를 만든다. (...) 냉소와 독설, 우울과 경멸의 포즈는 사람들을 은밀하게 밀어냄으로써 자기 안의 불일치를 간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이다. 타자에게는 다만 멀리서 바라보고, 동견하고 질시하는 시선만 허용된다. 호기심을 넘어서는 타인의 관심과 질문을 차단함으로써 빈약하고 공허한 자신의 근대성을 방어하는 것이다. 조선인들이 다른 조선인이 이른 선취를 조롱하고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한탄은 역으로 조선인들이 조선인에게 결여된 것, 레시피의 허세를, 그 근원적인 불일치를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조롱은 자기 자신이 누리는 성취마저 불신하는 근원적인 불안감, 열등감이기도 했다." 316-7 (레피크? 외메르?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자꾸 겹쳐 보인다.)

 

 

에필로그에서 제시되는 장덕조의 <내 이상하는 스윗트홈>에 그려지는 근대적 라이프스타일은 풍족한 소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1983, 스펙터클의 사회)가 제시한 '스펙터클'. "스펙터클은 단순히 이미지의 집합체가 아니다. 스펙터클은 현실 세계를 정당화하는 이미지들이자, 현실 세계를 보완하지 않은 채 현실과 분리된 그러나 실재하는 비실재(이미지, 환타지)로 존재한다. 무엇보다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들이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면서 실재가 될 때 그것은 스펙터클이 된다. 스펙터클은 현실을 구축하면 또 그렇게 현실이 된다. 드보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고의 스펙터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품임을 강조했따. 상품물신주의는 세계를 만질 수 있는 물건/사물들이 지배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324

 

인간성humanity의 회복을 위해. "탈식민화는 식민지민이 그리고 식민지배의 역사를 겪은 주체들이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국이 부정하고 스스로 파괴했던, 식민주의의 폭력과 모욕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인간성을 복원할 때 비로소 완료될 것이다." 325






  1. Dominique Moisi,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