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교양수업 독후감 과제 느낌(?!)의 읽기 편한 입문서. 이 책의 저자들은 경북대 강의교수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그래서인지 책도 탈식민주의를 주제로 한 수업과 그 수업을 듣는 학생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다. 프란츠 파농부터 시작해 사이드, 호미 바바, 그리고 스피박까지를 포괄한다. 아쉬운 점은 참고문헌이나 더 읽어볼 자료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인용문도 출처를 적어놓지 않았다.


1_프란츠 파농(1925-1961, 혁명가, 정신과 의사,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던 사람.)

  자신이 프랑스인이라고 믿고, 전통적인 식민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흑인. '조국 프랑스'를 위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국 프랑스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하며 자신이 그저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단순히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그가 받아야 했던 차별과 폭력들,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는 52년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들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달성할 필요성으 절실히 깨닫게 된다."(40) 61년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같은 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출간한 후에 36세로 숨진다. 파농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식민주의에 대해 저항한다. 그러나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역시 피해자이다. 이들 모두는 허구적인 관념으로 서로(타자)를 왜곡시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존재의 탈식민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 

**참고해볼 것: 조한혜정,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닌 못한 사회, 자신의 사회를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지 못한 사회"를 여전히 식민지라고 주장.(49)


2_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수년 동안 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에드워드'를 우물우물 건너뛰고 '사이드'를 강조하거나, '에드워드'를 강조하고 '사이드'를 대충 우물거리거나, 어느 것도 분명히 들리지 않도록 두 이름을 빠르게 이어 발음하곤 했다. (...) 내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의심을 품었고, 따라서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에드워드? 사이드?"(72. 에드워드 사이드 회고록 재인용)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세 의미를 설명한다. ①동양에 관한 학술적 연구나 교육, 저술 활동, ②동양과 서양에 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분에 기초한 사고방식"(77), ③동양을 서양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다루기 위해 활용하는 모든 제도적 장치.

로빈슨 크루소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 아름다운 계곡을 얼마쯤 답사하면서 조사를 하는 중에,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며, 나는 틀림없이 이 모든 지경의 왕이자, 주인이며, 소유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자 은근한 쾌감이 솟았다."(82) -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내 밑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리는 학문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동양'을 구현하고, 그 틀을 이해함으로써 자신들의 밑에 두려는 것이었다. 이 지배이데올로기는 '프라이데이'라는 등장인물로도 설명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윤치호, 서재필, 유길준, 나혜석 등의 지식인들 역시 오리엔탈리즘과 서양 헤게모니를 내면화하여 '게으른, '타락', '야만적'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동족들을 깎아내렸다. (자세한 인용문은 88-92 참고)


3_호미 바바(1949- 파르시 교도. 그래서 더 소수자와 이주민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마친 후 영국에서 수학. 탈식민화는 문화 분석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서구가 다른 문화와 폭력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바로 식민 지배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그 폭력적인 관계를 탈피하려면 다른 문화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105) 그는 '혼종성hybrid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우등한 문화와 열등한 문화의 경계를 없앰으로써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탈구조주의, 푸코, 데리다, 라캉 등의 영향을 받았다. 혼종성에 대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식민주의는 지배자의 통일성과 순수성을 전제하면서 피지배자에 대한 일방적 지배를 주장한다. ②하지만 그 통일성과 순수성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책략일 뿐이고, 실제로 지배자는 내적인 모순과 분열을 겪는다. ③따라서 지배자의 양가성을 적극 밝히고 피지배자의 혼종성을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지배와 피지배의 고착된 관계를 뒤흔들어야 한다.(109)

  소설 『빌러비드』에서 엄마 세드에게 죽임을 당한 첫째 딸 빌러비드가 유령의 모습으로 주위를 맴도는 것은 세드의 씻을 수 없는 죄책감과 상처를 나타내며, 마침내 그가 빌러비드 대신 백인 주인을 공격하게 되자 빌러비드는 사라진다. 여기서 빌러비드가 계속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말해지지 않은 과거를 말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피지배자가 식민 시대에 겪은 상처는 (...) 다시 말해져야만 해요. 그래야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식민 시대의 어둡고 끔찍한 상처를 어떤 식으로든 치유할 수 있을 거예요."(114)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여있는 것이 아니다. 재현되는 과거는 현실이라는 토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재구성된다, 지배자의 이야기와 피지배자의 이야기가 뒤섞인 혼종을 탄생시키면서 말이다. 이 혼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기존에 완성된 지배 문화나 지배자의 이야기를 해체시켜야 한다. 지배자들이 겪은 분열과 상처(지배자의 양가성)를 드러냄으로써 "우월한 지배자가 열등한 피지배자를 일방적으로 잘 지배해 왔다는 거짓말을"(119-20) 폭로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인도로 가는 길>에서 지배자의 위치에 놓인 영국이 느꼈을 절망과 피지배자로부터 소외당하는 경험[각주:1]을 아델라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일방적 지배와 통일성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상호작용과 양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지배자의 위대한 신화를 깨뜨릴 수"(126) 있는 것이다.

  호미 바바의 혼종성 개념은 문화 다원주의와는 구별된다. 문화 다원주의는 1항, 2항, 3항 등의 다양한 문화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1항과 2항이 더해져서 3항이 되는 것은 혼종성이 아니다. 혼종성은 사이에 낀in-between' 것이다. 경계를 허물면서,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권위나 행동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양가성과 혼종성은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식민 지배자의 분열로부터 나타난 양가성이 피지배자의 혼종성을 만들어내고, 그 혼종성에 다시 영향을 받은 지배자는 또다른 양가성과 혼종성을 만들어낸다. 


4_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1942-)

  1942년 영국령 꼴까따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코넬대에서 영문학 석사와 비교문학 박사과정을 이수한 후 미국을 근거지로 하여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를 '페미니스트적 마르크스주의 해체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작업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서발턴'은 "기존의 지배 담론들에서 배제된 피식민지인, 이민자, 노동자, 소수자, 여성 등 종속적 처지나 주변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용어"(165)이다. '하위주체'나 '하위계급', '하층민'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서발턴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안흔 복합적이고도 혼성적인 특성을" 지니며, "전 지구화 상황에서 서발턴의 범주는 특정 사회나 국가뿐만 아니라 국가 간, 인종 간, 계급 간, 성별 간 등등 여타의 모든 지배/종속의 관계에 적용"된다.(170) 서발턴의 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언제든 역전될 수 있는 열린 자리이다. 서발턴은 동질성이나 동일성에 대해 저항한다. 스피박은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개념을 사용하여 탈-구성, 탈-구축을 실행한다. 작품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고정되거나 확정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언제나 열려 있고, 이 열려 있음을 통해 "식민주의 담론이나 제국주의 담론의 허구성을 폭로"(185)할 수 있게 된다.

  스피박이 보기에 최악의 환경에 놓여 있는 서발턴은 '제3세계', '여성', '노동자'이다. 따라서 그는 제3세계 여성 노동자들의 해방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그가 페미니스트적 마르크스주의 해체론자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보듯, 서발턴은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담론 장치가 없다. 그들은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문화, 언어 체계에서는 읽히지도, 들리지도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은 지배집단의 필요에 의해서만 역사기술의 대상으로 등장할 때 주체 아닌 주체가 되어진다. 말할 수 있는 서발턴은 더는 서발턴이 아니다. 스피박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기존의 지배계급의 언어체계를 넘어서서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언어체계가 없다"는 것이다.(200) 그렇기에 서발턴은, 침묵으로 말한다. 스피박은 이런 침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지배적인 정치체제의 언어로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202) 


  1. 검둥이는 짐승이고, 검둥이는 불량스럽고, 검둥이는 비열하고, 검둥이는 추악하다; 깜둥이 좀 봐, 아 춥다, 깜둥이는 떨고 있다, 깜둥이는 춥기 때문에 떨고 있다, 작은 소년은 깜둥이가 무섭기 때문에 떨고 있다, 깜둥이는 뼈에 사무치는 추위로 떨고 있는데, 잘 생긴 작은 소년은 깜둥이가 분노에 치를 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떨고 있다, 작은 백인 소년은 자기 엄마의 품안으로 뛰어든다: 엄마, 깜둥이가 날 잡아 먹으려 해요. -파농 재인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