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사태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회적 소요는 우리 사회가 은폐하고 있던 다양한 문제의식을 환기시켰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들과 관련하여 푸코를 통해 권력,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논하고자 한다.


1. 전염병 대처 방식에 따른 권력 유형의 분석

군주권력-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추방한다.

규율권력-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감시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고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한다.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 선제적 예방 조치를 마련하려 한다.

등등, 모두 권력의 형태로 작동한다. 여기서 푸코는 '통치성gouvernementalit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권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억압적 뉘앙스를 걷어 내고 (신자유주의적) 통치 그 자체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통치성은 '인구를 주요 표적으로 삼고 정치경제학을 지식의 주요 형식으로 하며 안전장치를 본질적인 기술적 도구로 하는' 권력, 즉 생명관리권력이다."(19)


2. 메르스와 신자유주의

*푸코는 니체의 영향을 좀 받은 것 같은데, 니체의 '귀족의 도덕(자신의 뛰어남을 먼저 알고 자신에게 못 미치는 사람을 열등하다고 봄)'이나 '노예의 도덕(자신보다 강한 자를 악한 자로 규정하고 강자에게 맞서지 못하는 스스로를 선한 자로 봄)'을 참고하자. 노예의 도덕의 대표자가 바로 기독교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함으로 써 '뛰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꺾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절대 악'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시대에는 실천적 한계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악한 자'를 적으로 먼저 상정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선한 자'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노예의 도덕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 방식에서는 스스로를 '선한 자'로 여기지 못하면 투쟁의 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므로 끊임없이 '악한 자'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맞서 싸우고자 하는 상대에게서 어떤 빌미든 끌어내어 '악'으로 낙인찍기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스스로를 '진보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들이 악한 자로서의 강한 자에게 맞설 수 있는 것은 저들과 달리 자신들은 선하다는 명분 때문인데, 이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 조그마한 도덕적 흠결만 발견돼도 곧바로 행동 불능 상태가 되어 버린다."(24)

  저자는 오늘날 '절대악'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를 "오늘날 투쟁해야 하는 전선이라는 것들이 제국주의나 군부독재 등 거시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소한 이해관계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의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갑을 관계에서 갑이 악하고 을이 선하다는 식의 논리가 되풀이되고 있는데 이 "갑을 관계가 연속적이면서도 비선형적으로 얽혀 있기"(25) 때문에 악인 갑은 또한 선한 을이기도 하다. 갑을 관계의 연쇄에서 마지막 저 높은 곳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3. 메르스와 통치성

  권력 관계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친한 사람 둘이 있어도 그 안에서의 '권력관계'가 있다. "문제는 이 권력관계가 유연성을 잃고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고찰되어 버릴 때이다. 푸코는 이를 일컬어 권력관계가 '지배 상태'에 빠졌다고 표현하며 이 지배 상태로부터 건강한 권력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36) '자유'라는 개념은 전통적으로 억압이나 지배가 없는 상태, 유아론적으로 평온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를 말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유' 개념은 '저항하는 세력들 간의 관계(권력관계)에서 행동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에 가깝다. 우리는 "개인들의 의지나 욕구가 상호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37)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자유 개념을 '정태적 자유', 오늘날의 자유 개념을 '동태적 자유'라고 부를 때, 정태적 자유는 타자가 부재하지만, 동태적 자유는 타자에 대한 반응과 상호작용을 통해 성립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지배 상태 안에 있다고 친다면, 피지배층인 노예는 종속 상태에 놓이는 것이 자명하지만, 지배하는 자 역시 역설적으로 자신의 대항 세력이 없기 때문에 타자를 확보하지 못해 '동태적 자유'를 상실한다. 이런 상태는 비판과 저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사회는 병들어가게 된다. 푸코의 권력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비판'의 문제다. 통치자는 직언에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하며, 비판자는 사익을 위한 게 아닌, 공동의 이익을 위한 직언을 해야 한다. 푸코는 여기서 '파레시아'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적 맥락에서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직언'이나 '간언'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파레시아' 행가를 통해 비판을 듣는 통치자가 불쾌함이나 정치적 목적 때문에 비판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협약을 공고히 하면 할수록, 그 통치자는 현명한 통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44) 푸코는 통치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