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ward Said by Bill Ashcroft and Pal Ahluwalia (2001)

#오늘날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연구의 권위자 중 하나인 애쉬크로프트가 쓴,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개론서. 쉽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람시는 비판적인 작업은 바로 역사적 과정의 소산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 역시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 차원'을 인식하고 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오리엔탈리즘과 탈식민주의를 연구하게 된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1978)을 쓸 때는 아랍의 나쁜 이미지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으며, 『문화와 제국주의』(1993)을 쓸 때는 이런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사이드는 이에 맞선 탈식민적 전략으로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 속의 다양한 차이들(여자나 어린이, 평범한 삶에 대한 이미지들)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베르 멤미Albert Memmi에 따르면 탈식민성은 "눈에 보이는 자유의 장치들과 은폐되어 있는 부자유의 지속으로 특징 지어지는 역사적 조건"이다. "독립 후에도 존속하고 있는 식민지배의 흔적과 기억들, 지식과 가치의 식민화가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10) 역자는 윤치호에게 내면화된 제국의 시선을 언급한다.(백인 아이들을 천사로 바라보면서 흑인 아이들에게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각주:1]) "제국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본다는 것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제국의 기준에 종속됨을 의미한다. 문명과 야만의 척도는 물론이요, 진리와 거짓, 선악과 미추에 대한 판단까지도 제국의 '시선'에 종속된다."(13)

  사이드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이론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곳에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24)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문제에 대해 논하든 그에게는 '망명한 팔레스타인 지식인'으로서 놓이게 되는 '굴절된 장소'로부터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3차 중동전쟁은 사이드를 기존에 놓여 있던 장소로부터 이탈displacement[각주:2]시켰다. "사이드는 자신을 전치되고 고향에서 '망명한' 자로 집요하게 위치시킨다. 그리고 어떤 본질적인 팔레스타인 문화의 실재를 고안해내기보다는, 모든 문화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문화와 정체성은 그 자체가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문화적 정체성은 뉴욕에 자리잡음으로써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다. (...) 이는 뉴욕의 국제적 특징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사이드의 본성, 즉 위치location에 대한 강박과 문화적 다양성 및 이질성에 대한 매료, 지식인은 정치 구조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학자적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31) 그는 이러한 이중적인 정체성을 '틈새 공간in-between space'에 있다고 본다. 그는 미국에서는 팔레스타인 옹호자로, 팔레스타인에서는 지나치게 서구화된 인물로 양쪽에서 외면받기도 하였다.

  그의 주저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을 '아는' 과정 자체가 서양이 동양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라 말한다. 서양의 권력 하에 구성되고 보여지는 동양은 그 자체의 실제 모습보다 더 '동양적'이어야 했다. 이 저서의 후속편으로 인식되고 있는 『문화와 제국주의』는 "서양의 문화적 생산물들은 그 속에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현실을 미묘한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며, "문화 없는 제국은 없"다고 주장한다.(36) 그는 서양을 비난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탈식민 작가들이 그들의 문화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제국의 지배적인 문학 양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도 말한다.(-안으로의 여행the voyage in) 그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권력이나 정치와 거리를 둠으로써(망명, 또는 속하지 않음not-belonging) 자신의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중요히 여겼다.


1

  사이드가 만든 식민담론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이론가인 호미 바바나 스피박이 계승하면서 두 담론이 같은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각주:3]. (이와 별도로, 사이드는 미셸 푸코의 담론을 채택하였으므로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이드의 식민담론은 보다 '세계-내적'이고 물질적이다.(42) 사이드는 또한 지적 아마추어리즘을 옹호하며 이로부터 생산되는 세속 비평을 지지한다. 현대 비평의 문제는 극단적인 기능주의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비평에서 논해지는 것들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화되고 본질화됨으로써, 하나의 문화적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인과관계와 지속성과 사회적 현존을 지닌 것처럼 여겨진다."(42, 사이드 재인용) "여기 이곳"으로부터 출발하는 현실 지향적인 담론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르트[각주:4]가 말한 것과는 달리 텍스트의 '저자'는 죽을 수 없으며, 저자는 그 자체로 (물질적) 텍스트에 영향을 미치는 텍스트적 구성물[각주:5]이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기표와 기의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구조주의는 기표와 기의가 항상 기호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그 연결이 자의적이지만 안정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탈구조주의는 우리가 '기의'라고 생각해 왔던 것들이 사실상 또 하나의 '기표'라고 생각한다. "의미는 거의 무한한 기표들의 연쇄로 '지연'된다."(49) 이러한 탈구조주의는 60년대 후반부터 인기를 끌었지만, 이것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텍스트라는 개념과, 의미가 끝없이 지연된다는 생각은 "문화적 생산물이자 행위로서의 텍스트를 그것이 생산된 권력 관계의 맥락과 결별시키고, 강박적인 글쓰기의 욕망을 비활성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 사이드는 문학을 [고립되어 있고 고정된] 비활성적인 구조로 취급하면 문학 역시 세계 속에 위치한 하나의 '행위'라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고 주장한다."(50) 사이드가 보기에 리쾨르의 주장[각주:6] 역시 잘못된 것이다. "사실 가장 정제된 형식의 텍스트조차 항상 상황과 시간, 공간, 사회에 연관된 존재 방식을 갖는다."(55) 텍스트가 명시적 지시물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것이 놓여진 자리에서 의도된 해석의 방향성을 지닌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독해에 의존한다. 그러나 독자들 역시 독자들이 살고 있는 세계성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텍스트는 그 자체로 세계성이라는 상황 내에 있게 된다.

  사이드에게 있어서 텍스트는 데리다처럼 무한한 해석의 자유가 있거나 끊임없이 지연되는 의미화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말과 분리되지 않는 구어성verbality을 가진다. 텍스트는 고전적 리얼리즘이 말하는 것처럼 텍스트 '바깥'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구조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텍스트의 구조만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텍스트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렇다고 텍스트만을 통해 세계가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텍스트 바깥과 텍스트의 구조(텍스트가 이야기되는 방식)는 공존한다. 

*노스럽 프라이의 제시형식presentation - 언어의 제시형식에는 관객 앞에서 연행되는 방식, 구술되는 방식, 글로 씌어지는 방식이 있는데 어떤 텍스트는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제시형식을 갖는다.

"텍스트의 세계성이 지닌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특성은, 텍스트의 주체와 형성 과정에서 모두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작가와 독자는 동등한 입장에서 의사소통에 참여하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민주적 교환이 아닌 권력의 산물이다[각주:7]. 담론적 상황이란 동등한 관계에서의 교환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인,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와 더 흡사하다. 말이나 텍스트는 세계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어서, 그 효과나 때로는 사용조차도 소유권과 권위, 권력과 힘의 부과와 관련된 문제가 된다. 오리엔탈리즘이 학문 분과로서 출현하는 것은 정확히 이런 불평등한 담론 관계에서다."(59-61)

**61쪽에 나온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아일랜드 출신 디덜러스와 잉글랜드 출신 학감의 언어 충돌. 자국 내 식민지 담론도 얼마든지 다뤄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의 세계성을 특징 짓고, 비판적 독해의 다양한 가능성을 조명해주는 중요한 이항대립 중 하나는 '계통관계filiation'와 '제휴관계affiliation'이다. (...) 계통관계는 자연적 혈통을 가리키는 반면, 제휴관계는 문화를 통한 동일화 과정을 지시한다. 사이드는 제휴관계를 일반적인 비평 원리로 격상시킨다. 비평가는 제휴관계를 통해, 텍스트가 생겨난 '세계'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들과 계통관계로만 연결하는 협소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62)

"그러므로 제휴관계적인 그물망을 복원하는 것은 텍스트와 사회, 저자, 문화를 묶고 있는 실들을 눈에 띄도록 하고, 그 실들에 물질성을 되돌려주는 것이다."(64, 사이드 재인용)


2

  사이드는 현대 비평이 가진 가장 큰 문제가 지나치게 전문화되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문화된 직업적 비평은 역설적으로 동시대 사회의 해결해야 할 절박한 문제들로부터 비평을 멀어지게 한다. 사이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속적 비평'을 제안한다. 이는 비평 자체를 그것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하는 비평이다. "(...) 초점이 협소한 이론과 비평의 전문화가 우리 시대의 비평 감각을 특징 짓고 있다. 세속적 비평은 바로 이 점을 완강히 반대한다. 그리하여 사이드는 비록 비평에서 모호성과 모순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을지라도, 독단을 피하기 위해 그런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세속적 비평 형식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72) 따라서 그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실용적 비평, 문학사, 감상 또는 해석, 문학이론이라는 네 가지 비평의 기본적인 형태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가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추어의 '직업이 아니면서도 어떤 것에 깊이 연관됨'이라는 뜻 때문이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일은 쉽지 않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고 권력이 자신의 말을 듣게끔 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권위를 전제해야지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이드는 '망명'을 제시한다. 망명은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두 관점(뒤에 남겨두고 온 것의 관점과 지금 여기에서 부딪히는 현실적인 관점)을 균형있게 가지게 한다.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작품들도 망명이라는 상황 하에 씌어질 수 있었다. (***파묵은 망명자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중요한 이유를 망명자의 위치에서 두 관점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도르노의 망명도 사이드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에세이에 관해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을 참고할 것. 루카치에 의하면 "에세이란 문학의 이미지나 철학의 의미로도 포착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이면서 직접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과,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잡은 동경을 표현하려는 형식이다."(80) 사이드에게 있어 에세이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성과 개념성으로 포착하고자 했기에 살아 있는 경험이라는 구체적 현실은 아니다. 그러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지나 책과 같은 비본질적 매체를 통해서만 고찰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좋은 예인데, 그가 논한 문제들과 그의 죽음은 별 관계가 없다. 에세이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다. "오직 에세이 외부의 어떤 것만이 그것을 중단시키거나 끝낼 수 있다."(81, 사이드 재인용)

*사이드는 소유, 소유를 소유하는 것 이 두 차원에서 문화를 정의한다. '소유'의 관점은 문화는 사람이 속해 있는 것이자 소유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어원을 따르며, '소유를 소유하는 것'은 앞서 말한 '소유'로서의 문화가 다른 특정한 집단에게 소유되며, 그 결과 승인과 배제의 체계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92)

*헤게모니는 1930년대에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람시가 만들어낸 용어다. '동의에 의한 지배'라는 뜻으로,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라는 믿음을 다른 계급들에게 확신시키는 힘에서 나온다고 한다. "헤게모니는 제국주의에서 특히 중요한데, 피식민인의 생각을 좌우하는 능력이야말로 식민지에서 제국의 힘이 가장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제국'이란 그 문화적 헤게모니의 효능으로 인해, 중심화된 힘이 강제로 조종하는 주체들의 상태와는 구분된다."(93)

(***파묵이 그려 내는 터키(인)는 서양 중심의 헤게모니를 내면화한 증상을 보여준다. 헤게모니를 지배하는 힘을 빼앗긴 '제국'도 '제국'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제국의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것. 제국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 제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피식민지의 역할이 중요한데, 실질적으로 오늘날 모든 비-서구 지역들이 서구의 헤게모니를 체화한다.)


3 『오리엔탈리즘』

  사이드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당연히, 『오리엔탈리즘』이 가장 먼저 거론될 것이다. 이 책은 유럽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양'을 알아 가고 그 과정에서 지식이 어떻게 권력과 관계맺으며, 동양인이 어떻게 새로이 구성되고 지배되는지를 밝힌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주로 유럽이 타자들을 정의하고 타자에게 '위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 유럽의 우수한 '질서'·'합리성'·'균형'과, 비유럽의 열등한 '무질서'·'비합리성'·'원시주의'는, 다양한 오리엔탈리즘 학문 분과들을 그 안에서 맴돌게 만드는 자기확증적인 지침이었다."(108-9) 이 책의 목표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응시'를 전복시키고 이를 '동양'인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것, 즉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의 주체에게 남긴 흔적들을 기록하는 기록하는 것"(113)이다.

(***고대인도는 '좋은'동양이며, 현재의 아시아와 북아프리카는 '나쁜'동양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1978:99) 확인해볼 것!!)

  『오리엔탈리즘』은 ①오리엔탈리즘의 범위, ②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③현대의 오리엔탈리즘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범위를 설명하면서 사이드는 그것의 세 분과를 제시한다. '학문 분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지식이다. '사고방식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 사이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분에 기초해" 있다."(119) 마지막으로 '집합적 제도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있다. 이는 "동양을 지배하고 동양에 대한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구조로서 오리엔탈리즘이 지닌 무정형적인 능력을 가리킨다."(119 )첫 두 분과는 동양을 텍스트로 창조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으며, 마지막 분과는 "동양에 권위와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런 텍스트들을 어떻게 유용하는지를 보여 준다.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것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동양과 서양 두 항 중 한쪽만이 동양과 서양 양쪽의 현실이 어떠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121) 사이드는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시작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부터라고 보며, "많은 점에서 한 문화가 분명 더 강력한 다른 문화에 의해 진정 과학적으로 전유되는 전형적인 사례"(1978:42 사이드 재인용, 123)라고 덧붙인다. 이때부터 서양은 '동양'에 대한 사유에 여러 수식어를 붙이며 그런 수식의 틀 안으로 제한하기 시작한다. 동양이라는 개념 역시 그 자체로 모호한 '상상의 지리imaginative geography'이다[각주:8]. 사이드는 학문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연극과 같은 폐쇄된 공간이고, 그 안에서 재현되는 것들이 서양이 보는 동양의 이미지라고 비유한다. 게다가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은 분명 그것을 보는 사람들-서양인들-의 땅에 지어져 있을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극장 안에서의 암묵적인 규범들로부터 출발하여 그 안에서 재현되는 것들을 왜곡시켜 버린다. "(...)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은 '근본주의적 실재론'의 형식을 띠게 된다. (...) 동양의 특징은 어떤 단어나 어구로 고정되며, "그 다음에는 그 단어나 어구가 현실성을 확보하게 되거나, 혹은 더 단순히 말해 현실 그 자체가 된다.""(125) 타자로서의 동양을 정의내리는 것은 서양이 자기 자신을 정의내리고 그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쟤는 저렇게 행동하네, 신기하네'라는 생각은 타자로서의 상대방이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주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양인은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동양'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사이드의 대답은 'NO'다. "동양'은 그 자체로 구성된 존재다. 그렇기에 고유한 지역과 문화, 인종적 본질에 기초해 정의될 수 있는, 서구와 근본적으로 '다른' 토착적 거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관념 역시 논쟁의 여지가 많다."(1978:322, 사이드 재인용 138) 

  물론 『오리엔탈리즘』의 오류도 존재한다. 독일이 식민지를 별로 갖고 있지 않아 독일에서의 동양 연구를 간과한 점, 동양학이 실제로 동·서양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 등등. 그럼에도 이 텍스트가 여전히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이 텍스트의 중요성은 유효하다. (사이드에 대한 비판은 139-158 참고.)

"영은 사이드의 근본 명제가 오리엔탈리즘의 반인륜적 본성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문제는 사이드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재현에 반대하기 위해, 서구의 인본주의적 전통에서 인간에 대한 사유를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다[각주:9]. 이 때문에 사이드의 작업은 오리엔탈리즘적 견해와 위험스러울 만큼 가까워졌다. 영은 이렇게 질문한다. "오리엔탈리즘을 포함하여 도대체 어떤 지식이 오리엔탈리즘을 비난하는 관점을 피해 갈 수 있겠는가?""(153-4) 저자는 서구의 이론적 전통을 비판하기 위해 바로 그 전통에서 나온 도구를 채택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이런 전략이 오리엔탈리즘을 폭로하려는 주제와 모순되지는 않으며 이는 탈식민적 저항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아시아에 기반한 것으로, 이를 토대로 '동양' 전체로 확장시키거나 본질화시켜서는 안 된다.(라타 마니, 루스 프랑켄베르크) "이들 비판의 중요 논점은 서양과 동양이 각기 단일한 실체들처럼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동서양 간의 권력 관계에 대한 사이드의 기술은, 오리엔탈리즘 담론 안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차이와 모순들, 반헤게모니적 입장들뿐만 아니라 권력 자체의 담론적 본성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받는다."(157) "연구 대상이 되는 민족을 지배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인본주의적 지식이란 것이 가능한가? 침묵하는 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제 자신을 재현하게 되는 것이 가능한가?"(로스 체임버 재인용, 162)


4 『문화와 제국주의』

  현대의 제국들은 어떤 나라를 약탈한 뒤에 그들을 '계몽'시키고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채로 그곳에 눌러앉는다. 제국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문화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이드가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①제국주의 문화의 일반적이고 전세계적인 패턴, ②제국에 대항하는 저항의 역사적 경험이다. 문화는 제국의 헤게모니를 확고히 한다. 또한 문화는 또한 그 사회의 정치적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둘의 관계는 비가시적이며 잘 드러나지 않기에 저항하기 쉽지 않다.

  사이드에게 있어 제국주의는 ""멀리 떨어진 영토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제국 중심부의 실천과 이론과 태도들"로서,"멀리 떨어진 영토에 정착하는" 식민주의와는 구별되는 과정이다. 제국은 한 나라가 다른 정치적 사회에 정치적 주권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관계이다."(175) 제국주의는 제국이 떠나간 이후에도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 등을 통해 그곳에 남아 있기에 단순히 '제국'과도 구별된다. "제국주의는 문화 속에 투입됨으로써 지리적 제국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 힘을 행사"(175)한다. 여기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양식은 제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사이드는 『킴』에 묘사되는 주인공의 낙관적인 모험 이야기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어떠한 시선을 담고 있는지, <아이다>에서 표현되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무대장치나 플롯이 어떻게 제국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식민지의 모습을 은폐하는지, 『이방인』이 프랑스령 알제리를 어떤 식으로 암시하고 있는지를 포착해내기 위해서는 '대위법적 독해'를 통해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위법적 독해'는 피식민지인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다시 읽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텍스트에서 제국 중심부의 역사와 동시에 지배담론의 적대적 작용을 받고 있는 종속되고 은폐된 역사들을 인식할 때, 텍스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다른 시각을 얻게 된다."(179)




(마지막 장인 5장은 사이드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설명으로, 대충 훑었다.)














  1. <윤치호 일기>, 1892년 3월 18일 [본문으로]
  2. 또는 전치dislocation:주체가 추방이나 망명 등의 이유로 국가, 민족, 고향 등 자신에게 안정적이고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위치나 자리에서 벗어난 상태. [본문으로]
  3. 사이드의 식민담론 이론은 식민화의 기저에 있는 정치적·물질 적 목표들을 은폐하는 방식을 입증하며,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이론은 유럽의 지배가 식민지 사회에 행사한 문화적·정치적 영향력과 그 사회들이 보인 반응의 특성에 관한 명제들을 조사하고 계발한다.이는 특히 제국의 언어나 문화가 식민지 사회에 어떤 변형을 가했는지, 또 (44-5) [본문으로]
  4. 1950-60년대 사이에 일어난 구조구의 혁명에서 바르트(1915-80)는 text라는 용어를 제시하며 문학작품들이 '계열적 축'을 가진 구조적 산물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트 역시 나중에 자신의 구조주의적 견해를 철회한다. [본문으로]
  5. 텍스트에 대한 논의는 바르트, 「텍스트의 이론Theory of the text」 참고. 텍스트는 작품과는 달리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로 포착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6. 폴 리쾨르, 「텍스트란 무엇인가what is a test」 참고. 그는 텍스트의 의미는 연기되고, 텍스트가 '공중에 붕 뜬 채' 세계 바깥에, 혹은 세계 없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본문으로]
  7. 니체. [본문으로]
  8. '서양 연구'라는 학문 분과는 없다. 즉 '동양'이나 '동양 연구'라는 말은 유럽인들을 정의하기 위해 존재한다.(124) [본문으로]
  9.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담론이 있을까? [본문으로]